[문학] '소설의 미래/미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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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미래/미궁/구광본 지음, 행복한 책읽기, 6천원/1만2천5백원

문학의 위기, 소설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영상.게임 등에 밀려 찬란했던 영토를 속절없이 빼앗기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판타지.추리소설 등 하위 장르소설들과의 몸싸움이 버겁다는 진단이다.

실지(失地) 회복은 커녕 생존 가능성마저 불투명해 보인다.

'본격문학' 소설가 구광본(38.사진)씨가 동시에 펴낸 문학 에세이 '소설의 미래'와 소설 '미궁'은 각각 탈근대 디지털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소설의 모습을 전망해 보고, 전망이 제시하는 새로운 소설의 문법에 충실하게 실제로 작품을 써 본 것이다.

구씨는 1986년 소설로 등단했고 이듬해에는 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소설은 부르주아가 주도한 서구 시민사회의 형성.발전과 함께 태동한 근대의 산물이다.

예술적 뿌리는 그리스.로마의 서사시, 신화.설화.민담 같은 이야기문학 두 갈래에 가 닿아있지만 19세기 들어 지배적인 문화형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하부구조의 변화 덕분이다

. 소설의 위기는 20세기 후반 들어 인쇄에 기반한 문화가 전자 매체를 이용해 정보를 저장.전달하는 전자문화에 의해 밀려나는 추세로부터 비롯된다.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아날로그적인 책으로는 더이상 담아낼 수 없게 되고, 책의 자리를 디지털 네트워크가 대체한다. 책이 추방당하는 상황은 문학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다.

물론 추체험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소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의 보편적인 기능은 생명력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문학성은 영원하다'는 주문(呪文)만으로 소설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순진하다.

결국은 소설은 독자에 따라 매번 다르게 읽히는 하이퍼 픽션으로 변해가거나, 대표적인 문화형식의 자리를 영상.게임에 내주고 일종의 데이터 베이스 역할을 하는 기반적인 문화형식으로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

구씨의 결론은 앞으로 소설이 환상을 붙잡는 데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상은 지금까지 소설이 억압했던 인간의 이면과 관련된 것이고 문화적 금기에 묶였던 욕망을 보상한다.

환상.신화에 주목하는 방향전환은 도구적 이성에 매몰됐던 과거 일방주의에서 벗어나 인생의 여러 양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소설의 미래'는 소설 '미궁'을 해명하는 거대한 배경 설명, 또는 각주일 것이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패러디, '제1의 골목'에서 '제13의 골목'까지 13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혼돈의 세계다.

시인 이상의 본명이었던 김해경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애인으로 둔 소설 속 주인공 이상이 미로 같은 열세 골목을 체험한 끝에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는 게 큰 줄거리다.

예수.요한.마르크스가 각각 이사.요하나.마극사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보르헤스 소설 속의 기묘한 도서관, 고래 뱃속에 갇힌 선지자 요나의 얘기도 나오는 소설은 잘 짜여진 서사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소설 속 공간도 무대 세트처럼 비현실적이다.

논리적인 전개를 대신해 독자의 눈을 붙들어 매는 힘은 어쩐지 의미없는 중얼거림처럼 느껴지는 낯익은 이야기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엮어내는 긴장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구씨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날개가 부러진 이상을 다시 불러내 인류학적인 혼돈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고 말한다. 92년 발표됐던 구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구성이 크게 바뀌고 분량도 늘어났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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