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제3화 고려신사 59대 궁사 고려징웅씨(2)|제1장 자랑스런「귀화인」의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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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참배 후 대신된 일인도>
궁사와 자리를 같이한 넓은 방안 머리 위에는『신덕여천』이란 큼직한 액자가 걸려 있다.
고려신사는 출세의 신, 개 운의 신으로서 극히 영험이 있다고 신사소개「팸플릿」은 말하고 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수야연태랑씨는 대정11년 6월7일 참배하고 그 달 12일 내무대신이 되었으며, 병구웅행씨는 소화3년 9월15일 참배, 다음해 8월2일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등등 영험의 실례들을 늘어놓고 있다.
여하튼 고려신사는 아득한 예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황무지 무장야를 개척하고 평화스런 마을로 다스린 야광의 정신을 떠받들면서 일신의 출세와 개 운을 돕는 성역으로 주민들의 숭상을 받아왔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사무소에서 배 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돌사자 두 마리가 있다.
한 떼의 학생들을 이끌고 온 남자선생 하나가『어흥』하고 우리말 표현을 써가며 이들 사자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었다.

<박대통령, 비둘기 보내>
반가워서 쫓아가 언사를 청하니 동경에 있는 조총련계 학교 교원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김이라는 성만을 밝히고『피차 거북할 테니 더 이상은 말하지 말자』고 꽁무니를 뺐다.
3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한 핏줄기 조상의 유적을 찾아온 그도 현실에는 외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무소 뜰 한옆에는 72년 박대통령이 동경 무도 관에서 열린「세계평화대회」에 기념으로 보냈던 비둘기 한 쌍이 길러지고 있다.
새장에 달아놓은 설명문에는『평화의 비둘기』라고 쓰여 있으며, 세계평화대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신사에서는 앞으로 이 비둘기를 잘 길러 크게 번식시키겠다고 알리고 있다.
견학 온 조총련계 학생들은 설명문을 힐끗 보고는 이 비둘기장 앞을 어색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고려징웅씨는 배전 앞에 있는 실물창고의 문을 열고, 이 신사의 국지적 중요문화재인 『구신형문장복륜태도』를 보여주었다. 은을 입힌 청동 칼로 도신에 이름 그대로 느릅나무(신) 잎에 싸인 비둘기 4마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이 신사에는 역시 국지적 중요문화재로 대반야경 4백56첩이 전해져 내려온다.
참배 객들은 야광의 신체를 모신 본전과 연결된 배전 앞에서 손뼉을 치고 절을 하게 되어있다.
배전 앞에는 다른 신사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큼직한 나무상자가 놓여있다. 참배 객들이 동전을 집어넣도록, 즉 헌금을 하도록 한 것이다.
매년 10월19일 대제가 열리면 이 신사 배전 앞에선 가면을 쓴 사자춤이 벌어진다고 한다. 피리를 불며 탈춤을 추는 것이다.『마을의 재앙을 쫓아내는 춤』이라고 고려징웅씨는 설명했다.

<금품 봉납 인사들 명패>
「도리이」를 지나 배 전에 이르는 길목에는 이곳을 참배, 금품을 봉납한 인사들의 명패가 나란히 걸려 담을 이루고 있다.
이름아래 봉납한 금액도 쓰여 있는데 2천「엥」이상을 내면 사무소에서 이곳에 명패를 해 다는 모양이다. 1만「엥」에서 5천「엥」, 3천「엥」등 갖가지이다.
명단들을 훑어보면 일본에 갔던 우리나라 유명인사들의 이름 전시회를 보는 느낌이 든다. 모모한 인사는 거의 다 망라돼 있으며, 이 신사만큼 우리나라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도 없다는 증거이기도하다. 역대 주일대사를 비롯, 공사·국회의원·특사·정계인사·장관들이 어찌 내 이름이 빠질 소냐 하고 서로 경연한 듯하다.『일본에 살고있는 교포들도 마음의 고향을 찾듯, 자주 이곳을 찾아온다』고 고려징웅씨는 말했다.
고려신사에서 포장된 길을 따라 약 10분 남쪽으로 내려오면 야광의「왕묘」를 간직한 성천 원이 나온다.
성천원은 고려산 승악사라고도 부른다. 목조누각식 인왕문이 어두워지는 저녁 놀 속에 낯선 객을 맞는다.
단층 누각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 목조건물은 색이 바래 시커멓도록 고색이 짙다. 그 앞에 비바람에 낡아 이제는 글씨조차 분명치 않은 설명만이 세워져 있다.

<…고려왕 야광이 이 고을의 수장으로 세상을 뗘나신 후 앞으로 받들어지고 고려명신이라 불린다. 한국에서 그와 함께 온 중 승악은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절 하나를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천평승보 3년(751)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제자 홍인은 야광의 제3자와 함께 스승의 유지를 계승 절을 세워 스승의 명복을 빌었다.
그래서 이 절은 고려산 승악사라 불리며 야광이 조국에서 가져온 수호신성천환희불을 모셔놓아 성천원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희진언종 지산 파에 속하며, 아래로 5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상대까지 50대의 법등을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는 명찰이다. 국지적 중요문화재로 동종이 있으며 야광의 묘,「사암다중탑」이 있다.>
승악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씨 계도 첫 머리에도 보인다.
『천평승보 3년, 고려승 승악이 눈을 감다. 홍인은 그의 제자 성운과 함깨 유골을 모시기 위해 새로 한 절을 세워 승악사라고 불렀다. 성운은 바토 야광의 3자이다.』

<야광명복 비는 승악사>
다시 말해 승악사는 고구려에서 야광을 따라 일본에 온 중 승악의 제자 홍인과 야광의 셋째 아들인 성운이 그 스승이자 망부인 야광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인 것이다.
성운은 셋째 아들이기 때문에 적자만을 대대로 기록해 온 고려씨 계도에선 빠져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적자의 사연 난에 승악사를 세운 일로 분명히 남아있다.
흥미 있는 것은 여기서는 야광의 묘를 뚜렷이「고려왕묘」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가 왕족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은 야광을 어느덧 왕의 칭호로 부르게 된 것이리라. 이 절 입구 인왕문 오른쪽에 있는 이 왕묘 사암오중탑은 1천여 성상을 거치는 동안 풍화되어 탑신이 삭아 없어질 위험에 있다. 재작년에 당을 만들어 탑신을 그 안에 안치해 놓고 있다. 왕묘 입구에도 철책과 문을 달아 보통 때는 잠가놓고 있다.

<우리양식 본뜬 사암 탑>
사암오중탑은 사암을 포개놓은 다중 탑으로 그 탑 모양이 우리 고래의 탑자 양식을 그대로 본뜨고 있다. 우리 나라에 흔한 석탑의 그 소박한 미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탑 당에는「고려왕묘」라는 전서 체(소서 체) 현판이 위엄 있게 걸려 다시 한번 이곳 일대 고려씨의 존재를 부각시켜준다.
탑당 옆에는 중수 때 그 비용을 봉납한 사람들의 명단이 비석에 새겨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이 탑당보다 더 우람차고 높아「아이러니컬」하다.
봉납자 명단에 우리 나라 모모 인사들이 더 많이 끼여있어 그런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일까. <계속>
◇정정=본 연재 제9회 7단 30행「전라남도 영암군 구촌리」는「…구림리」, 동 제10회 2단 6항 중「천하여장군」은「천하대장군」의 잘못이었기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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