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달러 공직자, 1차대전 때 첫 등장 … 세금 떼면 70센트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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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2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3 클래런스 하우 전 캐나다 군수·보급부 장관. 4 무하마드 알리 진나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
마이클 블룸버그

‘연봉 1달러’.

12년간 ‘세계 경제·문화의 수도’ 뉴욕을 꾸려온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한 해 받아 온 봉급이다. 지난해 말 물러난 블룸버그는 제대로 된 보수를 받기는커녕 선거운동과 시 운영 등을 위해 사재 6억5000만 달러(약 6858억원)를 털어넣었다. 고위 공직을 출세와 축재의 수단으로 여기는 아시아 지역의 그릇된 풍토와는 완연히 다른 이 같은 처신은 미국 등지에선 드문 일이 아니다. 그의 사퇴를 계기로 ‘연봉 1달러’ 공직자의 세계를 살펴본다.

한국에선 생소하지만 무료봉사 공직자는 미국·캐나다를 위시해 인도·파키스탄 등에서도 적잖게 존재해 왔다. 근 1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관행인지라 영어권에선 ‘연봉 1달러 봉급자(dollar a year man)’란 표현이 무료봉사 공직자를 의미하는 상용어로 굳어졌다. 한국에 잘 알려진 미 정치가 중에서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도 한 해 단돈 1달러를 받고 일했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이들 모두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부들이다.

연봉 1달러는 공직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적잖은 최고경영자(CEO)들도 연봉 1달러, 또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정열적으로 일한다. 구글의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 그리고 현 회장인 에릭 슈밋,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 야후의 공동창업자 제리 양 등이 그랬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연봉 1달러 공직자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들 CEO 대부분은 연봉 대신 보너스나 스톡옵션을 받고 일하는 까닭이다. 액수가 정해진 연봉 대신 자신의 성취에 따라 보상을 받는 셈이다. 이들 중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챙기는 경우가 많아 같은 연봉 1달러짜리이지만 블룸버그 시장과 같은 무료봉사 공직자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블룸버그, 사재 6억5000만 달러 털어
연봉 1달러 봉급자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면서부터다.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시 체제를 꾸리면서 국가에 대한 리더들의 헌신을 촉구했다. 이에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자 워싱턴포스트 소유주였던 유진 메이어를 비롯한 수많은 재계·금융계·학계 전문가들이 전시 체제에 동참해 돈 한 푼 안 받고 각 분야에서 일했다. 유능한 금융투자가인 메이어는 전시재정회사(War Finance Corporation)의 대표로 1차대전이 끝난 후까지 일했다. 이들이 굳이 1달러를 받은 건 미 정부에서 무급 직원을 채용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1달러라도 받아야 미 정부와 해당 직원 간의 계약관계가 성립해 직무에 따른 의무조항을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다.

이런 전통은 1차대전 종전 후에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1925년부터 4년간 봉직한 앨번 풀러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다. 자동차 딜러 사업으로 미국 내 손꼽히는 거부가 된 그는 부지사를 거쳐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는 심각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거부인 그로서는 봉급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연봉 1달러 봉급자는 2차대전이 터지면서 또다시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국만이 아니었다. 캐나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22년간의 의원 생활 중 주요 각료직을 섭렵해 ‘만능장관(minister of everything)’으로 불렸던 클래런스 하우는 1939년 2차대전이 터지자 캐나다 기업인들에게 자발적인 전시체제 참여를 호소했다. 그 결과 군수·보급부 장관으로 임명된 하우는 자신의 휘하에 유능한 기업전문 변호사, 전 철도·운하 담당 차관, 성공한 비즈니스맨 등을 연봉 1달러짜리 참모로 부릴 수 있었다.

2차대전 후 독립한 파키스탄에서도 사실상의 무료봉사 공직자가 출현한다.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 해방된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영국에서 유학한 변호사였다.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그는 하루에 1500 루피를 버는 잘나가는 변호사였으나 총독 취임 뒤에는 한 달에 1 루피를 받았다.

옆 나라 인도에서는 영화배우 출신인 자야랄리타아 자야람 타밀나두 주(州) 수석장관이 대표적 무료봉사 공직자다. 140여 편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그는 1982년 34세의 나이로 정계에 투신한다. 이후 그는 1991년 타밀나두 주 수석장관으로 일하게 되자 한 달 1루피의 봉급을 고집했다.

이처럼 캐나다·파키스탄·인도에서도 금전적 대가 없이 헌신하는 공직자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큰돈을 모은 뒤 정계에 투신하는 경우가 많은 미국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80년대 이후에도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비롯해 수많은 히트 영화에 출현했던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2012년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연봉 1달러 공직자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보디빌더였던 슈워제네거는 영화 출연으로, 컨설턴트로 일했던 롬니는 공격적인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

블룸버그 시장도 경제뉴스 전문 블룸버그통신을 설립해 거부가 된 건 마찬가지지만 뚜렷하게 다른 게 있다. 봉급을 안 받은 건 물론이고 자신의 돈도 아낌없이 썼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세 번의 시장 선거에 2억6800만 달러를 쏟아부었으며 2억6300만 달러를 뉴욕의 문화·예술 단체 등에 기부했다. 이 밖에 소수인종 지원을 위해 50만 달러, 시청 직원들을 위한 부식비로 80만 달러를 쓰는 등 모두 6억5000만 달러를 사용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무급 주말 수사관 하는 변호사도
봉급 1달러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업무와 관련된 각종 혜택을 포기한다는 서류를 작성하는 게 복잡하다고 한다. 대략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를 읽고 사인해야 한다. 그나마 이들이 한 해 받는 돈도 정확히 1달러에 못 미친다. 여기서도 소득세를 떼 실제로 가져가는 돈은 70센트 안팎이다. 미국에선 세금을 제외한 70센트 안팎의 봉급을 수표로 지급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이를 받아서 자신의 계좌에 입금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받은 수표를 책상 속에 처박아 둬봐야 쓰레기밖에 안 돼 서랍 정리 차원에서 은행에 넣는다고 한다.

이처럼 성가시기조차 한 무료봉사 공직을 왜 많은 미국인들은 기꺼이 맡으려 할까. 이는 무엇보다 공직을 사회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는 인식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에선 고위직이 아닌 일반적인 공직에서도 무료 봉사자들이 많다. 예컨대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관 대리(sheriff deputy) 중에는 평소에는 변호사로 일하다 주말엔 무급 수사관으로 변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nam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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