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3)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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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점령하의 남한>
북한의 이른바 「남반부 해방지구에 대한 정책」은 앞서도 말했듯 6·25동란 두 달 전인 4월,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에서 그 대강이 결정되었었다. 김일성은 그 결정에 의하여 남파요원을 선발하였으며 그들을 1개월 이상이나 특별회견을 시켰다는 것도 앞서 쓴 바와 같다. 물론 이러한 사항들은 몇몇 실무자들에 의해 극비로 진행됐다.
뒷날 알게된 것이지만 김일성은 당초부터 북한군의 보조병력으로 남한의 청년들을 징발하여 소위 「남조선 인민의용군」을 조직, 한 개의 소모품으로 이용하였었다.
동란이 일어날 때까지는 한국군은 물론, 북한군도 징병제가 아니고 지원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처음에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38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서울시민의 대부분은 북한군과 한국군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였지 서울시민 자신들이 북한군에 징발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강제적인 징발이 시작되자 김일성의 목적은 콩대로써 콩을 볶듯 남한청년들을 소위 의용군이라 징집하여 남한청년(국방군)을 말살하려는 정책이라는 것을 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하는 방법이 설득에 의한 방법이 아니고 강제적인 것이었다. 길가는 청년들을 무조건으로 강제로 잡아가며, 그것도 모자라서인지 가택수색까지 하여 청년들을 잡아다가 학교운동장에 납치, 모아서 전선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북한군의 점령아래서 소위「남조선인민의용군」으로 강제 징모한 수는 김일성의 연설가운데 40만이라는 숫자가 나와 있다. 김일성은 40만의 남한청년들의 피를 이용하려고 들었던 것이다. 또 도로·교량의 수리복구 및 식량·부상병의 수송을 위한 노력대로서 부역을 강요했다.
북한군에 의한 강제부역은 일본 식민지 통치자들의 「근로봉사」보다 몇 배나 고역이었으며 또한 실제로 생명이 위험한 것이었다. 미 공군의 집중폭격을 받는 간선도로·철도·교량 등에 모래가마니를 쌓아 올리며 수리 복구하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제일선에 못지 않게 위험한 장소였다. 자기네들의 공병이 할 일들을 남한 주민들에게 시키려는 것이었다.
세 째로 북한군이 먹을 자기네의 식량을 가져오지 않고 북한군을 위한 식량을 점령지에서 징발하려는 정책도 병행되었다. 식량을 북한군의 군량으로 모두 빼앗았기 때문에 서울시민의 식량배급이 정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북한군의 가는 곳마다 서울을 위시하여 굶주림의 지옥으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가장 눈앞이 캄캄하던 일제 식민지시대에도 최저 하루 2합5작의 식량배급은 보장되었었다. 해방 후의 미군정시대 그리고 이승만 시대에도 사상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주민등록을 하고있는 주민에 대해서는 생활할 수 있는 식량배급을 주었다.
그런데 소위 「해방군」이라고 자칭하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에는 최저의 식량배급까지 정지하고 말았다. 시민들에게 배급하려고 창고에 쌓여 있는 식량은 북한군과 노동당 기관과 북한 정권기관의 복무원에게 한하여 배급하였다. 이것이 김일성이 옳다고 주장하는 소위 「식량의 중점적 배급정책」이었다.
다시 쉽게 말하자면 『노동하지 않는 자에게는 먹이지 않는다』는 정책이다. 북한군의 점령 하에서는 서울시내의 모든 공장·직장은 모두다 문을 닫고 작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노동할 직장도 다 폐쇄해 놓고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이지 않는다』고 식량배급을 일방적으로 정지하여 버린다는 것은 정치가 아니고 살인행위였다.
북한인민군이 남침하였을 때 모든 세밀한 계획을 사전에 수립하였으나 한가지 군량을 수송 휴대할 계획만은 세우지 않았었다. 그것은 김일성이 「러시아」혁명시대의 적군과 백군과의 국내전의 경험을 그대로 모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러시아」적군은 기본적으로 군량을 휴대하고 다니지 않았었다.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주민들의 협력에 의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정은 그것과 달랐다. 북한군이라는 것은 소련의 적군과 같이 전국적 혁명군도 아니며 대중의 지지도 없는 김일성의 사병과 같은 군대였기에 남한의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다(이에 관하여는 1955년에 북한의 군사 「아카데미」의 장교들이 북한군은 노동당의 군대도 아니며, 김일성의 사병도 아니며 조국통일전선의 군대라고 하며 김일성의 사병화 정책에 반대운동을 일으켜 숙청 당한 사건이 증명하여주고 있다).
김일성의 군량의 현지조달정책, 식량의 중점적 배급정책은 남한주민과 서울시민을 완전히 적으로 만들고 말았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3개월간 서울 시민들은 기아선상을 헤매었으며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농촌으로 흩어져 갔었기 때문에 9월 초가 되니 서울의 인구는 3분의1 정도로 줄어지고 말았다.
자칭 「해방」하였다고 선전하는 서울에서 사람들이 도망쳐갔으니 김일성의 정치가 얼마나 독하고 자기 모순적인 정치인가를 증명하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속><제자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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