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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연구 불충분 … 교과서 논란 두고두고 남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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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사편찬위원회 유영익(78) 위원장이 취임(지난해 10월 1일) 이후 처음으로 공식 말문을 열었다. 위원장 취임을 전후해 진보진영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던 그다. 역사학자로서의 학문적 성과를 폄하당했고, 가족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졌지만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언론 인터뷰도 모두 거절했었다.

1월 2일 오전 10시 경기도 과천시 국사편찬위 강당. 신년 시무식 자리에서 그는 ‘120년 전 갑오년의 민족적 수난과 국치(國恥)를 잊지 말자’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120년 전 갑오년에 발생한 동학농민봉기,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은 그의 젊은 시절 연구주제였다. 일반적인 새해 덕담이 아닌 학술 토론회 발제를 연상케 했다.

 시무식 이후 그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갑오년 이야기는 계속됐다. “국사편찬위원장을 맡지 않았다면 120년 전의 갑오년 연구를 더 집중적으로 했을 것”이라며 “동아시아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사람들은 동학농민봉기를 가장 중요시하고, 다음으로 갑오경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교과서에도 그런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청일전쟁이었다”며 “청일전쟁을 잘 이해해야 갑오년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란에 대해선 “두고두고 문젯거리로 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너무 부족하고, 또 교과서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장 취임 이후 가장 힘들었던 일을 꼽는다면.

 “국회 국정감사에서다. 야당 의원들로부터 오해를 많이 받았다.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승만을 편파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제가 쓴 논문이나 책을 잘 읽지 않은 것 같았다.”

 (※진보진영 인사들의 유 위원장에 대한 비판은 우파 성향의 교학사판 교과서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전개됐었다. 역사 교과서의 검정 업무를 국사편찬위원회가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 위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연구를 주도해 왔다.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검정은 그의 취임 전에 이뤄진 일이지만 그가 비판의 한복판에 섰던 배경이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이라는 책에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한 끝에 드디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위업”이라고 쓴 것이 비판 받았다. 그 구절이 이승만 대통령을 미화한 표현이 아니란 말인가.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말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가 자신의 책에 그렇게 인용한 것을 내가 재인용했다. 하지와 이승만은 초기에 사이가 안 좋았다. 그렇게 3년을 보내다 하지가 마침내 백기를 들면서 이승만의 행적을 야곱 이야기에 비유해 평가한 것이다. 나 역시 60년대 대학생 시절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부터 이승만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됐다.”

 -2012년 2월 9일 서울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후진국에서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말을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후진국에서 독재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정치학자들이 연구해 주길 바란다는 얘기였다. 정직하게 말해 후진국 개발국가들은 그런 과정을 겪은 것 아닌가. 현재의 중국도 그렇고. 이런 거는 정치학자들이 연구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국정감사에서 아들의 신상에 대한 비판까지 받았는데.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었다고 가족의 약점까지 폭로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것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다.”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제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왜곡되고 잘못 인용되는 것이 겁이 났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란은 이제 좀 진정이 되는 건가.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지만, 교과서 문제는 두고두고 문젯거리로 남을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 역사, 특히 근·현대사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 아직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다. 이승만에 대해서도 제가 처음 깊이 들어가 연구했지만 다 연구한 것도 아니다.”

 -교과서 제작 기간이 너무 짧고 검정심의위원 수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는 교과서를 담당하는 전문가가 거의 없다. 교과서는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고 고도의 학문적 수련을 거친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 맞춰서 모범적인 문장으로 기술해야 한다. 일본 문부성에는 교과서 전문가가 50여 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평생 교과서만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시무식 얘기로 돌아가자. 갑오년의 의미가 왜 그렇게 큰가.

 “갑오년 하게 되면 1894년 갑오년을 사람들이 생각하기 마련이다. 동학농민봉기,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꼬리를 물고 동시에 일어났다. 우리에게는 1945년 해방만큼 획기적 의의가 있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그중에서도 청일전쟁의 의미를 잘 되새겨봐야 한다.”

 -청일전쟁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일본이 중국을 이긴 것은 청일전쟁이 처음이다. 동아시아는 과거에 중국이 패권국가로 주변의 조공국을 통제하면서 평화를 유지했던 것인데 이것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후 전개되는 갑오경장에서 중국식 제도가 서양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우위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이어진다.”

 - 역점 사업이 있다면.

 “ 국사편찬위가 지난 10년 동안 수집해 온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을 도울 것이다. A4 용지보다 1.5배 크기의 종이 500만 장이 넘는 자료가 수집돼 있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기초를 닦을 것이다.”

  만난 사람=배영대 문화부장
정리=이정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유영익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갑오경장’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휴스턴대 부교수를 지내다 귀국해 고려대와 한림대 사학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와 현대한국학연구소 소장, 역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갑오경장 연구의 기초를 놓은 전문가로 통했다. 2014년 다시 갑오년을 맞는 그의 감회는 남달라 보인다. 갑오경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돌린 것은 94년 이후다. 이화장(이승만 대통령의 사저)에 소장된 문서 정리작업을 주도하면서다. 저서로 『갑오경장 연구』 『이승만의 삶과 꿈』 『(이화장 소장) 우남 이승만 문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생애·사상·업적의 새로운 조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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