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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동양학자회의 결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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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유홍렬·최호진·김원룡 교수의 귀국 종합보고서>
제29차 국제동양학자회의가 학회창립 1백년을 맞아「프랑스」의 「파리에서 지난7월16일∼21일 열렸다. 이 회의에는 세계 63개국의 동양학관계 전문학자들 3천여명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선 국내학자 23명, 재외국학자 20여명이 참가했으며 북한에서도 11명의 대표를 파견했었다. 문공부는 7일상오 이 회에 참석했다 귀국한 유홍렬 박사(성균관대 대학원장), 최호진 박사(연세대상대교수), 김원룡 박사(서울대문리대교수)등 세 학자들의 보고회를 마련했다. 이들이 설명한 국제동양학자대회의 전모를 다음에 소개한다.

<경과>
국제동양학회의는1873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조직됐으며 동양학에 관심을 갖는 「유럽」학자들의 회의라는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것이 「아시아」「아프리카」지역을 포함하는 학자회의로까지 확대 발전된 것이다.
한국대표들은 대체로 1957년 미국에서 열렸던 24차 대회부터 참가, 60년 「모스크바」대회를 걸러, 64년 「뉴델리」에서의 26차 대회, 67년 미국 「미시건」대학에서의 27차 대회, 70년 호주 「캔버라」에서의 28차 대회에 소규모의 참가를 해왔다.
이번 29차 대회는 종래 50여개국 1천∼2천명 참가의 규모에 비해선 크게 확대된 셈이다.
회의는 「근동」부터 재10분과「한국과 일본」에 이르는 10개 분과와 「현대도서관의 역할」을 다룬 분과 등 11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됐는데 여기서 발표된 논문만도 모두 1천3백40여편이었다.
이중 한국관계 발표논문은 64건(한국학자42건, 북한학자8건, 재외한국학자8건)이었다. 그밖에는 영국·「이탈리아」·일본·소련등 외국학자들의 발표였다.
회의 특히 한국분과에서의 남북학자들의 토론은 관심을 모은 것이었다.

<고학자>
「한국·중국·일본에서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을 주제로 한 회의는 중공대표들이 이 대화를 「보이코트」, 참석하지 않아 다소 맥빠진 것이 됐다.
그러나「파리」「프티·팔레」에서 열린 「중국의 최근 고고학적 발굴전」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구석기시대로부터 당·송 등 역사시대유물 수백점이 전시됐는데 귀중한 것이 많았다.
북한학자가 『고구려 고분벽화』는 종래 그들의 고고학적 이론을 되풀이하는 것이었고 새로운 것도 없었다.
관심이었던 북한의 고고학현황, 한국사 특히 고대사의 시대구분문제에 대해 논의할 기회는 없었다.
북한학자들은 『고구려벽화』라는 영화를 보여줬는데, 그들이 근래 발굴한 20여기의 고분중 단2개만을 담고 있을 뿐 선전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북한고고학 연구소장 전호영(45)은 북한대표 중 학자로 보이는 인물가운데 하나였다.
김원룡 박사가 그에게 『통구 무용총고분 벽화가 일제 때 찍은 사진과 비교할 때 많은 부분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그는 『탈락부분은 일제 때 없어진 것이다. 중공지역이기 때문에 역시 보존협조를 얻기가 어렵다』고 했다.

<역사학>
『북한역사과학의 발달』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북한학자 이봉현 여인(33)의 발표는 북한역사학의 전모를 밝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 발표에서『우리 나라가 세계의 최고의 국가』이며 훌륭한 구석기유물발굴 성과를
기초로 고조선이 기원전 8세기에 성립했음을 설명했다. 또 그는 노예사회였던 고조선에서 봉건국가 적인 고려·조선을 거쳐 갑신정변에 의해 자본주의가 성립했다는 확고한 유물사관에 의한 역사시대구분을 했다.
그러나 토의에서 그의 유물사관 적인 시대구분방법은 한국학자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받고 당황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유홍렬 박사는 『19세기의 한국근대화에 대한 「프랑스 신부들의 영향』을 발표하면서 「카톨릭」신자인 실학자 정다산을 강조했는데, 북한에서 크게 추앙되는 다산에 관한 북한학자들의 질문은 의외에도 없었다.

<경제학>
최호진 교수의 『한국개항과 관세문제』와 두 재외학자의 『60년대 외국투자와 한국경제개발』등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재외학자들의 한국경제문제에 대한 발표는 자료도 불충분하고 현실을 잘 모르는 너무 빈약한 것이었다.

<북한학자들>
북한사회과학원원사이며 박사·교수·소장의 직함을 가진 최선옥을 대표로 모두 50대 이하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11명 중 1명은 통역. 이들은 학자로 보이는 2,3명을 제외하면 선전원이란 인상이었다.
16일 점심은 북한학자들이 초청해 7명의 한국학자가 참석했고 그 저녁엔 한국대표단의「리셉션」에 북한대표 11명이 모두 참석했다.
유홍렬 박사가 김석형 박시형 김수경 등 원로학자들이 모두 경성제대 후배들인데 왜 이번에 참가하지 않았는가고 묻자 『그들은 나이가 많아 못 왔다』고 했다. 이 대회에선 원칙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연관된 발표를 하지 못하도록 돼있었으나 북한학자들은 이를 곧잘 어기고 자기선전에 시간을 보냈다.
또 대회참가논문은 지난4월까지 제출토록 돼있었는데 북한학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회의 당일에 발표를 고집했다. 이들은 인쇄물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제목과 요약만 내놓아 학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성과·전망>
28차까지 한·중·일을 한 분과로 다루던 것을 이번에 한·일 분과와 중국분과를 구분한 것은 먼저 한국의 비중향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회의가 해방 후 최초의 국제학술회의에서의 남북대화였던 것은 의미 깊다. 남북학자들이 만나 각분야에 걸쳐 발표·질의·응답을 하는 가운데 남북한학자들은 서로 연구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들은 너무나 「이데올로기」중심이었고 선전적이었다.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국어가 영어·불어와 함께 처음으로 학술용어로 채용된 것도 의의가 깊다. 따라서 한국관계의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그 정통을 과시할 때가 됐다. 한국관계 국제회의를 한국에서 열어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부 재외한국학자들이 자기 말을 잊어버리고 영어로 발표하는「난센스」는 우리국민 모두가 생각해 봐야할 일이다.
고고학·역사학분야 등에서의 남북학자들의 공동연구는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었다. 또 국제회의가 너무 남북 대결식으로 되면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순수한 학술연구와 발표가 더욱 중시돼야겠다. 다음 30차 회의는 3년 뒤 「멕시코」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는 미국독립 2백년기념도 겸하는 모임이 될 것 같다.
한편 회의기간에 「파리」국립도서관은 「동양의 보물」이란 제목으로 인쇄문화전시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세계최고 금속활자 인쇄본으로서 『직지심체요절』이 전시됐다. <공종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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