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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1화 선묘녀의 비련과 의상대사①|프롤로그-심층발굴의 의미|글·사진 김승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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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은수 루천년,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헤치면서 일본 속에 살아 남아 아직도 생동하고 있는 한국문화의 심층을 찾아 나선 여로이다. 이 긴 여로의 첫발을 멈춘 곳은 경도시 서북쪽 50리 밖에 있는 『도가노오 산 고산사』.

<「심층」여로의 첫 기착지>
이 절에는 신라 전성기의 거승 원효와 더불어 우리가 잘 아는 의상대사(625∼705)의 당나라 유학 때 정인 선묘를 신으로 모신 숱한 사연들이 있다.
이 사실은 일본 불교학자 강전준웅씨의 글 「조선불교」(『불교강좌』제Ⅳ권261항)에서 읽고 처음 안 것이다.
화엄종의 조사라 알려진 원효나 의상을 모시는 이유야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의상의 한낱 정인에 불과하며, 더군다나 일본인도 아닌 당나라의 여인 선묘를 일본인들이 자신의 신으로 떠받들어 지금까지 그 앞에서 합장배례 한다는 것은 그냥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원효나 의상의 사상이 일본불교나 그들의 생활에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기에 그토록 이들을 숭상할 뿐 아니라, 그의 정인 선묘까지도 일본인의 신이 되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현장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일본의 옛 서울 경도에서 이름난 명산인 남산을 스쳐 그 고산사로 가는 길은 구절양복. 숲, 숲-거송·노삼·아름드리 단풍나무 등이 빽빽한 숲 속을 뚫고 길은 끝도 없이 올라간다. 마치 이 숲길의 끝닿는 데가 하늘이 아닌가 싶다.
기자가 모는 차가 경도서북 교외를 빠져 화원역 근방을 지나면서부터는 맑은 청상천(경도서북쪽 모미·상미·고웅 등 세 영산 사이를 흐르는 강) 급류가 휘감듯 좌우로 뺑뺑이를 돌면서 자꾸만 현기를 일으키게 한다.

<절다운데 없는 석수원>
기록엔 이 근방을 개척하여 길을 닦고 다리 놓은 것이 우리의 조장들이라 헸으니, 옛 신라의 고승대덕들이 태백산·지리산계곡에 터를 닦아 부석사·화엄사를 창건했던 당시를 잠시 생각해 본다. 화엄종에서 말하는 이른바 「화엄정토」란 결국 이런 곳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형언할 수 없을 이만큼 유현한 산색계성이 한데 엉겨 마음은 어느덧 멀리 속진을 떠난 기분으로 고산사 경내에 들어섰다
일본인들은 고산사를 두고 자기네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한단다. 사시사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조용하면서도 어딘지 엄한 이 절 주변의 경관으로 하여 일본인들은 그런 향수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문에 다다르자 대뜸 마음에 지피는 것이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귀 -「사비」(적)【일본인들은 자신의 문화를 『「사비」의 문화』라고도 한다】-바로 이 말과 맥락이 닿는 어떤 냄새가 이 절 안팎에 풍기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이 절은 흔히 생각하는 것 같은 가람은 아니다. 건물이건, 불상이건 간에 그 어느 것 하나도 특별히 절다운 데는 없다. 일본사원건축에서 그토록 흔해빠진 다중탑 조차 보이지 않는다.
숲 속으로 뚫린 이끼 낀 긴 삼도를 다 가노라면 우리 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흙담의 축대가 있고, 그 한쪽 끝에 역시 우리 나라 고가의 대문을 연상케 하는 목조의 출입문이 안으로 열려 조용히 내객을 맞을 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금당·개산당·유향원·객전 등 몇 채의 조촐한 가람건물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절의 중심은 아무래도 다실풍의 목조건물 석수원(일본국보·1224년 건립)이다.

<우리대문 닮아 인상적>
이 건물은 이른바 「석전조」라는 양식의 일본건축으로서 창건당시 일본황실의 어른 후조우상황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았다는 내력이 붙어있다. 그가 친필로 써 붙인 사호의 액자가 지금도 선명하다. 툇마루를 통해 눈 아래 펼쳐진 경관이 기막히도록 아름답다. 허지만, 이 집 전체가 풍기는 공기는 아무래도 다 마시면서 담담한 선문답을 하기 위해 만든 조촐한 다실 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바로 이 석수원에야 말로 우리 나라와는 뗄래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숱한 사연들이 고이고이 간직돼 내려온다.
신라의 거승 원효·의상을 자신들의 「조사」라 하여 그 전기를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가 하면, 그 중에도 특히 의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물에 빠져 용이 됐다는 당나라 여인 선묘를 신상으로 새겨 깊숙한 장 속에 모시고 있는 것 등을 볼 수 있다.
첫째 것은 극채색 그림물감으로 원효·의상대사의 전기를 그려놓은 두루마리. 여기에 선묘의 얘기도 들어있다. 정식명칭은 <화엄종 조사회전회권>(전6권·일본국보)으로서 화첩은 31.5㎝. 전장6m여.

<동자상에「스카프」달아>
둘째 것은 목각의 선묘신상과 선묘동자상. 전자는 높이 4㎝의 대좌 위에 서 있는 상고31㎝의 겸창시대 조각으로서 담경이라는 작자명이 들어있다. 후자는 작자·제작 년대를 알 수 없으나, 역시 목각의 동자상. 앙징스럽게도 누군가 목에 「스카프」를 달아주었다.
이 가운데<화엄종 조사회전회권>의 원본은 경도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어 현장에선 복사판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이 회전, 즉 그림전기는 고산사의 중흥사 명혜상인(1173∼1232)이 그 고제 혜일방 인성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고 자신이 얘기 줄거리를 붓글씨로 써넣었다. 본래 표제는<의상·원효회>로 돼 있던 것을 후일<고산사연기·화엄종조사회전>이라 고쳐 달았다 한다.

<해골 속의 물 마신 원효>
-얘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초기(650), 한국이 낳은 위대한 학승 원효와 의상은 함께 입당구법(당나라 가서 불도공부)의 길에 올랐다. 도중 날이 저물어 둘은 요동지방 어느 묘지 근처에서 야숙을 하게 되었다.
밤중에 갈증을 느낀 원효는 무심코 머리맡에 괸 물을 찾아 마셨는데, 날이 샌 뒤 자세히 보았더니 간밤에 마신 물은 바로 부근에 뒹굴고 있는 해골 속에 괸 물이었다. 원효는 갑자기 나오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효는 이 우연한 사건으로 크게 깨닫는 바 있어, 드디어 입당을 중지하고, 홀로 고국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불교유심론을 깨치게 되었다. 그는 삼라만상의 있고 없음이 실은 마음의 소치(생심)요, 그 마음만 없앤다(감심)면, 항상 무물의 경지에 도달하여 참다운 진리(진각)를 얻을 수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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