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인도군의 포로 관리 (8)|설득 설전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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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군 설득 장교단은 친공 포로들을 설득하는데 있어 「상대방과 자기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는 손자병법을 적절히 원용했다.
즉 국군 출신 친공 포로 귀환 설득에 나설 6명의 영관 급 한국군 설득 장교들은 10월 하순 공산 포로 수용소를 자진 탈출해 나온 조규문 이창회 포로로부터 그쪽 사정을 청문, 충분한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공산 측이 이쪽 반공 포로들을 설득할 때마다 참관인으로 나가 상대방의 「전술」들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이 같이 적정을 치밀히 분석 검토한 이편 설득 장교들은 치밀하고도 완벽한 전략을 수립, 12월초부터 귀환 설득을 시작했다.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군 측이 이처럼 늦게 설득을 시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친공 포로 숫자가 3백35명으로 반공 포로의 6분의 l도 안되어 그리 많은 시일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 정부가 이미 6·18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 포로 문제를 둘러싼 이념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과 중립지대에 나온 친공 포로들은 거의 치유 불능 정도의 공산 세뇌를 받았다는 점도 한국군 설득 장교단 전술에 작용했다. 여하튼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사력을 다한다는 격언 그대로 한국군 설득 장교들은 비록 수는 적지만 완강하기 비길데 없는 친공 포로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전력 투구 했다.

<철저히 세뇌 당한 친공 포로>
다음은 설득 관계 인사들의 이야기.
▲박영준 씨 (당시 육본 정훈감 겸 한국 설득 지휘 본부장 준장 =현 예비역 육군 소장·혜인 중기 사장·58) <공산 측과 겨루어 포로 설득을 주관한 「유엔」군 송환단 (단장 햄블린 미 육군 준장) 의 핵심부서는 포로들을 대면, 직접 송환 절차 해설 및 귀환 설득 임무를 담당한 설득부였어요.
설득 위원으로는 한국을 비롯, 영·불 등 참전 10개국 장교가 나왔지만 친공 포로 중 국군 출신이 절대 다수였기 때문에 자연히 한국군 설득 장교가 제일 많을 수밖에 없었지요.
나는 9월초부터 문산으로 들어가 최각균 윤하준 김귀수 선우전 김진구 김동식 등 6명의 영관급 장교들로 구성된 한국군 설득 장교단을 지휘하며 설득 전략을 짰습니다.
전략의 대체적인 윤곽은 UNCREG가 수립했지만 실제 한국인 친공 포로 설득에 임할 세부적인 대책은 우리 6명의 설득 장교들이 세웠어요.
어느 면에서는 「유엔」군 측의 설득 태도가 공산 측에 비해 좀 소극적 (?)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저들이 내놓은 친공 포로수가 너무나 적은데다가 그나마 공산 학습으로 아주 철저히 세뇌를 시켜놨기 때문이었읍니다.
과연 설득을 해보니 바늘로 찔러도 안 들어갈 정도로 막무가내입디다.
나는 UNCREG 참모장 「라이언」 대령과 함께 참관인으로 직접 5∼6회나 친공 포로 설득장에 들어가 있었는데 우리 설득 위원들이 문제가 생기면 즉각 달려와 물어보기도 했고 내가 막히는 대목이 있으면 「라이언」 대령이 지시 해주기도 했어요.
「라이언」 참모장은 우리에게 아주 협조적이었고 내가 무슨 상의만 하면 늘 모든 것을 『뜻대로 하라』는 태도였습니다.
▲김귀수 씨 (당시 한국군 설득 위원·소령=현 ○○부대 참모장 준장·45) <한국군 설득 위원으로 선발된 우리 정보 장교 4명과 정훈 2명은 8월 초순 김형일 (현 국회의원) 육본 정보국장으로부터 지시 사항을 듣고 미군 후방 기지 사령부 안에 부설된 「유엔」군 포로 교육대에 들어가 2주간의 교육을 받고 문산의 uncreg 설득부에 배속됐습니다.
우리 설득 장교들은 한사람이 50여명의 포로를 설득 귀환시켜야 할 전혀 생소하고도 중대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거예요. 북송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가 친공 포로보다 훨씬 많았기때문에 공산 측의 설득원은 북한 공산군 설득 장교만도 우리의 10배가 넘는 72명이나 됐고 그들의 설득 태도는 악착같았어요.

<공산측 포로 설득장 참관>
설득장의 참관인 중에는 소련군 고문관 같아 보이는 공산군 장교도 수명 있었어요.
물론 유엔 측도 16개 참전국 대표들이 설득 참관을 했구요.
우리들의 설득 기본 전략은 ①자유 분위기 과시 ②충분한 적정 파악 후의 임전이었습니다. 자유의 전시는 친공 포로는 물론 중립지대에 들어와 있는 전세계의 보도진과 NNRC의 중립국들까지를 겨냥한 근본적이며 다목적인 것이었어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10월 하순에는 한국군 출신 친공 포로 2명이 탈출 귀환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 우리의 전략 수립에 큰 도움을 줬어요.
우리 설득 장교단은 우선 청문을 끝낸 후 두 포로들을 직접 고향으로 데리고 내려가 자유의 품에 안기는 감격적인 장면들을 모두 「카메라」 에 담아 화보를 만들었습니다.
김창회 포로가 고향에 내려가 처자의 손목을 잡고 아버지의 밭갈이를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모습, 동네 주민들이 조규문 포로를 환영하는 열띤 장면 등의 사진은 물론 가족들과의 대화까지 모두 녹음을 했어요. 나는 당시 조를 그의 논산 고향집으로 직접「지프」에 태워서 데리고 내려가 이 같은 기록들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화보와 녹음들은 우리 설득 위원들의 친공 포로 설득에 큰 설득력을 가진 주무기가 됐었어요.
과연 수천 마디의 해설이나 설득보다는 감격스러운 한마디의 녹음 육성이 더욱 호소력을 발휘 했던게 사실이예요.
한편 우리 설득 장교들은 한번도 빠짐없이 공산 측의 반공 포로 설득장을 참관, 그들의 전술을 관찰해 다가 분석하면서 세부적인 설득 방안을 하나씩하나씩 새웠습니다.
하여튼 우리 설득 장교단은 설득 시한 며칠 전에라도 얼마 안 되는 친공 포로 설득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느긋한 태도로 빈틈없는 작전 계획을 세운 겁니다.
나는 12월초 친공 포로 제4수용소의 첫 설득을 담당,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14인용의 하얀 「텐트」로 된 설득 막사로 들어섰습니다.
들어가는 도중 중공군 경비병의 검문을 받다가 웃지 못할 희극을 관람했어요. 사람 수와 차 대수를 기록하는데 넘겨다봤더니 하나하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표시를 합디다.
내가 보고 웃음을 터뜨렸더니 중공군도 창피한지 (?) 얼른 종이를 뒤로 감추데요. 정말 한마디로 너무나 무식한 병사더군요.
▲선우전 씨 (당시 한국군 설득 위원·소령=현 국방부 정훈 국장·48) <포로 설득 공작은 전혀 전례가 없는 군의 「정치적 작전」이었기 때문에 위원으로 선발된 우리 한국군 장교들은 상당히 긴장들을 했었습니다.
우리들이 2주 동안 받은 교육이란 것도 교범도 없이 그저 포로 취급에 대한 제네바 협정, 구두 전달학 등의 강의 정도였어요.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설득술을 연구 창안해내야 할 설득이전의 또 하나의 임무 (?)가 주어진 셈이었어요.
포로 설득의 경험이 전무한데다가 철저한 학습으로 세뇌된 친공 포로들을 다시 깨끗이 탈색, 전환시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정말 전쟁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어요.
우리가 배속된 UNCREG는 통상적인 군 편성 기구 외에도 설득단, 참관인단, 전사반, 통역단 등 군력 사상 일찍이 없었던 임무를 수행키 위한 특수 기구들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우리 한국군 설득 장교단은 물론 독자적인 사령부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유엔」군 측의 친공 포로 설득에 주역이었기 때문에 10월1일을 기해 국방부 안에 「설득 지휘 본부」가 설치됐고, 본부장에는 박영준 준장이, 보좌관에는 양흥모 대위 (현 중앙일보 논설위원)가 보직됐어요.
설득 지휘 본부는 UNCREG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 국군 출신 친공 포로들에 대한 일체의 설득 전략을 세워 나갔고 외무부·국방부·육본 등에 대한보고 및 연락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12월초에 설득 작전 개시>
우리 설득 장교단은 정보 수집과 자료들을 마련해 가면서 「유엔」 설득 장교 단장인 「무어」 소령과 협의, 3백35명의 한국군 출신 친공 포로의 설득은 6명의 설득 위원이 10일간이면 충분하니 12월에 들어가서나 작전을 개시하기로 기본 방침을 세웠어요.
12월초 지휘 본부로부터 설득 개시 지시를 받은 우리 설득 장교들은 선임 장교인 최각균 중령을 중심으로 최종 준비를 했습니다. 각자가 설득장에 가지고 들어갈 사진과 수용소를 탈출해 자유를 택한 친공 포로들의 귀환 사실이 보도된 일간 신문들, 그리고 녹음기 등을 하나하나 점검한 거예요.
한편 지휘 본부는 설득 방식을 국방장관이 A형으로 결정했다고 하달합디다. A형이란 포로를 상대해 봐서 귀환 가능성이 있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득을 계속해 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기본적인 귀환 절차 설명만 간단히 끝내라는 거였어요.
이는 당시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한 판단으로는 친공 포로 중 반수 이상이 귀환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우선 이들을 골라낸 후 설득을 펴자는 작전이었어요.
◆주요일지 (1953년6월21일∼25일)
※21일 ▲미 187 공정대, 포로 경비 차 일본으로부터 한국 이동 ▲클라크 사령관, 포로 석방은 이 대통령 책임이라고 성명
※22일 ▲「미그」 8대 격추파 ▲클라크 사령관, 이 대통령 방문 요담 ▲「처칠」 수상, 한국군의 단독 북진 불찬이라고 언명
※23일 ▲이 대통령, 휴전 후의 정치 회담 기한을 3개월 이내 한정 주장 ▲조병옥씨, 한국은 「유엔」과 협조해야 한다고, 정부의 현 정책 비난 ▲「피어슨」 「유엔」 사무총장, 이 대통령에 포로 석방 항의 서한 .
※24일 ▲이용문 준장 비행기 사고로 순직 ▲미군사 사절 단장, 하노이 도착 ▲「그로테볼」 동독 수상, 과거에 잘못된 정책 시정 약속
※25일 ▲6·25 3주 기념식 ▲「아」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씨 착한 ▲일본 외무성, 독도(죽도)는 자기 영이라 주장 ▲동독 정부, 지난주 폭동으로 사망 25명, 부상 3백78명 났다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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