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인도군의 포로 관리 (6)|설득 설전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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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산 측은 53년10월15일에 가서야 겨우 반공 포로들에 대한 첫 설득 작업을 시작하였다.
설득 장소 시비로 3주간을 허송한 공산군은 우선 중공군 출신 반공 포로들의 귀환 회유에 나섰는데 10월15일과 16일 이틀동안 9백21명의 중공군 포로 설득에서 겨우 20명의 마음을 돌리는 참패를 겪었다. 이렇게 되자 공산 측은 전술을 바꾸어 이번에는 10월19일 북으로의 탈출 이탈자가 발생한 북한 공산군 출신 수용소의 반공 포로들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반공 포로들이 나체 「데모」로 설득을 거부하는데 성공하자 더욱 얼굴을 들 수 없게된 공산 측은 「강권 발동」과 설득 기간의 연장을 들고 나오면서 다시 설득 진행을 중단해 버렸다.
자체 수습을 마치고 반공 전열을 가다듬은 반공 청년단 논산지부 안의 H수용소가 자진 설득에 나섬으로써 10월31일에 설득이 재개돼 여기서 처음으로 북한 공산군 출신 반공 포로와 공산군 설득자와의 대면과 대결이 이루어졌다.
어색하고도 얄궂은 이 대결에서도 역시 군배는 반공 포로 측에 올랐다.

<적 구타도 외치며 설득에 항거>
거의 모든 반공 포로들이 「동무」를 연발하며 온갖 감언이설로 귀환을 애석하는 공산 측의 설득을 단호히 거부할 뿐만 아니라, 어떤 포로는 분에 못 이겨 설득원의 이마에 침을 뱉거나 「라이터」로 머리통을 내리 치기도 했다.
때로는 번번이 수라장이 되는 설득장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반공 포로 한사람에 인도 경비병이 3명씩이나 매달려 양팔을 붙잡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만신창이가 된 공산 측은 11월16일 제3차며 마지막인 한국인 반공 포로 설득을 트집 잡아 도중에서 중단한 채 스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렇게 돼 공산 측의 한국인 반공 포로 설득은 90간의 설득기간 동안에 총7 천8백70명 중 겨우 1천2백여명을 3회에 걸쳐 간신히 대면하고 막을 내렸다.
다음은 설득 설전에 승리한 당사자들의 이야기.
▲문중호씨 (당시 중립지대 반공 청년단 논산지부 단장=현 인천 거주·58) <10월 중순 북으로 탈출한 변절자가 발생한 우리 논산지부의 A수용소를 북한 공산 설득원들이 설득하겠다고 나섰을 때 인도군과 일촉 즉발의 위기까지 다다르면서 가까스로 설득장 출두를 거부하고 나니까 공산 측으로부터 「강권 발동」의 요구를 받은 「티마야」 장군이 직접 출두권유에 나섭디다.
내가 「티」 장군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반공 포로들을 설득 장으로 내 보낼 수도 있다』고 했더니 반색을 해요.
전제 조건으로 설득장을 먼저 가보도록 재의 했더니 당장 나를 자기 「지프」에 태우고는 운전병에게 차를 북으로 몰라고 명령합디다. 잠시 후 우리 반공 포로 수용소 북방 3백m 지점에 설치된 설득장에 도착, 막사 내부를 살펴봤더니 꼭 시정시켜야할게 한가지 있어요.
설득자와 피설득자의 좌석이 마치 재판장과 피고 석처럼 높고 낮아요.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한 즉각 시정을 요구, 우리 반공 포로 동지들이 오히려 공산군을 설득하는 자세로 앉을 수 있도록 뜯어고쳐 놨습니다.
그리고 나서 10월31일 우리 반공 청년단 논산지부에 H수용소 반공 투사 약 5백명이 「적구 타도」라 쓴 「샤쓰」들을 입고 17개 설득 막사로 나누어 들어가 공산 측 설득에 최초의 항전을 벌였어요.>

<인도군, 중재 역할 하느라 진땀>
▲차석씨 (당시 중립지대 병원 수용소 반공 포로=현 대한 반공 청년회 경기도 지부장·인천시 거주·50). <나는 원래 제48수용소에 있다가 병원 수용소로 들어오는 헌총의 지령들을 각 반공 청년단 지부와 대구로 다시 연락해줄 책임을 맡고 환자로 위장, 입원해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인 반공 포로들이 중립지대로 들어가던 날부터 계속해서 설득 결사 반대 「데모」를 벌이며 참석을 거부하자 공산 측은 우리를 『남한이 고도로 훈련을 시켜 들여보낸 특수부대원들로 편성된 위장 포로』라고 생떼를 쓰면서 NNRC 의장인 인도 「티마야」 중장에게 강경한 항의를 했어요.
그러자 입장이 난처해진 「티」장군은 반공 포로 대표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지금 공산 측에서는 강제로라도 끌어 내오라고 아우성이니 『제발 나를 좀 봐 달라』는 식의 설득장 출두를 종용하는 간곡한 설득을 했어요.
결국 설득을 거부하라는 헌총의 강경한 지령도 약간 누그러지고 포로 자체 안에서도 나가서 한번 싸워 보자는 의견도 있어 10월말 설득 무대에 등단했어요.
설득장은 남북으로 문이 나있고 안에는 한가운데에 설득원과 피설득자가 마주보고 앉게 돼 있으며 네 구석으로는 의사 봉을 쥔 인도 의장을 중심으로 중립국 대표들, 기자단, 「유엔」·공산 양측의 참관인단 등이 둘러앉아 있는 국제 무대였습니다.
1인당 5분씩 시간이 배당 됐는데 공산 설득원이 『고향에는 정든 부모 처자가 떡을 해 놓고 동무를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어서 북으로 가자』는 장광설의 대사를 외워대면 피설득 자인 반공 포로 동지들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라이터」나 책상을 들어 공산군 설득장교의 면상을 내리쳐 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설득장은 마치 서부 활극을 방불케 하는 함성, 비오, 폭력이 난무하는 유혈의 수라장으로 장면이 바뀌는 거예요.
어느 동지는 넣어 가지고 들어간 돌멩이로 공산 설득원을 까기도 하고 또는 벌떡 일어서 평안도 박치기를 퍼붓는가 하면 두 손으로 불을 붙여 올린 담배를 점잖게 받아 물고 『이 불쌍한 친구야! 어서 나를 따라 저 남쪽 문으로 나가자』고 역공의 설득을 하는 동지도 있었어요.
첫날의 설득에서 일어난 폭력 (?)을 단속키 위해 다음날은 인도 군들이 설득에 나가는 반공 포로의 소지품을 철저히 검사합디다.
이렇게 되자 반공 포로들은 공산군 설득 장교에 달려들어 물어뜯거나 얼굴에 침을 뱉는 전술을 사용했어요. 급기야는 인도군 3명이 설득장의 반공 포로 한 명을 경비, 양팔을 붙잡고 앉아 있는 제지 방법이 등장합디다.

<공산 설득 장교 얼굴 난자도>
그러나 11월 중순 제3차로 설득을 받으러 나간 동지 한사람은 기발하게「비수」를 간직하고 들어가 설득원의 얼굴을 난자해버렸어요.
그 동지는 「워커」 구두창 속에 든 강철을 꺼내 시퍼렇게 날을 세워 칼을 만든 후 다시 군화 창 밑에 넣어 가지고 인도군의 단속을 감쪽같이 통과해 들어간 거예요. 점잖게 앉아 설득을 받은 그는 북으로 가겠는데 좀 막사 뒤에 가서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설득 장교를 유인, 떨어뜨린 담배를 줍는 체하며 단도를 빼내 마구 찔러댔어요.
하여튼 한국인 반공 포로들이 나간 설득장은 언제나 공산 설득 장교들이 고함을 치면서 막사를 뛰쳐나가는 소동이 그치질 않았으니깐요. 마침내 피를 보고만 공산 측은 스스로 한국인 반공 포로 설득을 트집 잡아 중단해 버립디다. 그후 공산 측은 중공군 출신 반공 포로 설득만을 계속하다가 시한이다 돼 망신만 당하고 물러서고 말았어요.>
▲노한성씨 (당시 중립지대 제38 반공 포로 수용소 통역=예비역 육군 대위·현 서울 거주·43) <설득을 아예 거부했던 우리 반공 포로들의 처음 전략은 공산 측이 90일 동안에 전체의 6분의1 정도 밖에 대면을 못함으로써 개가를 올린 셈이었습니다.
사탕발림의 그들 설득 전과는 아주 미미한 거였어요.
고작 향수를 억제치 못하는 고령의 반공 포로 40여명을 귀환시켰을 뿐이니까요.
한국인 반공 포로들이 설득 거부에서 순응으로 방침을 바꾸어 설득장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제3국행을 선택하는 동지가 90명 가까이 나왔어요.

<고령 반공 포로 40명만 귀환>
그래서 반공 청년단과 각 대대에서는 일사불란의 행동 통일을 위해 별도로 분리 수용돼 있는 이들 동지들을 「대한민국 잔류」로 번의 하도록 권유 작전을 폈습니다.
나는 우리 수용소 대대장 전도국 동지와 모의, 제3국행을 위장 지원해서 그들이 수용돼 있는 막사로 들어가 15명의 동지를 번의 시켜 데리고 나왔어요.
자유도 공산도 아닌 제3의 중립국들을 택했던 반공 포로들은 대개가 젊은 청년들로 공부를 좀더 해보겠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혹시 개중에는 동료들로부터 사상적인 오해를 받아 입장이 난처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이들 70여명은 중립국들이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아 54년 모두 인도로 갖다가 3년 후 다시 제3국들을 택했어요.
이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동지가 한명 있고 인도에 4명, 「브라질」에 40여명, 「아르헨티나」「멕시코」로 10여명이 갔어요. 인도의 지기철 현동화씨, 「브라질」의 주승복 김시봉 임익간씨 등은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들을 했답디다.>
◆주요일지 (1953년6월11일∼15일)
※11일 ▲남시 및 태천 비행장 맹폭 ▲국회, 미 정부에 보내는 휴전 반대 「메시지」 가결 ▲부산의 휴전 반대「 데모」대에 미군 발포, 3명 부상
※12일 ▲휴전 회담 쌍방 참모 장교, 2반으로 나누어 토의 계속 ▲국방부, 휴전 대책위 구 성 ▲인도군의 포로 관리 초청 발송
※13일 ▲중동부 전선서 공산군 공세 ▲공산군, 24시간에 11만여 발의 포격, 최고 기록 ▲5대∼7대의 적기 인천과 김포에 내습 ▲진 내무, 휴전 반대 「데모」대의 과격한 행동에 경고 ▲미관변 측, 한국은 결국 휴전 수락한다고 언명 ▲소련, 휴전 회담에서의 포로 합의 환영
※14일 ▲중동부 전선서의 공산군 공세 계속 ▲광주 수용소서 포로 l명 사망, 7명 부상 ▲「캄보디아」 국왕, 태에 망명
※15일 ▲3만의 공산군, 중동부서 공세 계속, 일부 국군 진지에 침투 ▲2대의 적기, 한강다리에 투탄 ▲이 대통령, 한국에 불리한 기사 보도 용납 않겠다고 내외 기자에 경고 ▲5개 중립국 (스웨덴·스위스·폴란드·체코·인도), 한국 휴전 포로 송환위에 참가 발표.
◆정정=본연재 478회의 증인 중 「나현채」씨는 「노한성」씨로, 예비역 육군 「중령」은 「대위」로 각각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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