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발목 잡는 ‘통치불능’의 덫 분권형 리더십 개헌으로 돌파구 찾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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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 해소, 중장년층·노인 일자리 창출, 가계부채 해결, 반값 등록금, 창조경제, 경제민주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제시했던 공약들이다. 하지만 지금 이 가운데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건 많지 않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할 말이 많다. ‘대선불복’ 운운하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온 야당의 비협조가 지지부진한 공약 이행 실적의 원인이라는 게 여권의 항변이다. 박근혜정부 1년간 여야가 사생결단으로 싸우기만 한 결과 국회는 최악의 생산성을 보였다. 지금도 6000개 넘는 법안이 잠자고 있다. 집권 초 힘 있게 추진돼야 할 대통령의 공약 사업들은 줄줄이 야당의 반대에 직면해 있다.

만약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됐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그게 그거였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의석 수가 훨씬 많은 새누리당이 지금 민주당과 똑같은 이유를 들면서 반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 중에서도 집권 1~2년 차에 반대 진영의 극렬한 반발과 저항에 부닥쳐 국정을 수행할 동력을 찾지 못한 사례가 있다. 노무현정부 시절의 탄핵 사태, 이명박정부 때의 촛불집회가 그것이다. 여당 시절 추진하던 정책도 야당이 되면 반대하는 ‘불복’의 정치 관행이 노무현정부 이래 고착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이 ‘통치불능(ungovernability)’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정계와 학계에서 동시에 터져나온다. 성장률 둔화, 고용 감소, 재정 건전성 악화와 같은 국정 악재가 동시에 엄습하고 있는데도 정치적 혼란 탓에 국가가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구조적 무능 상태’를 말한다.

이는 원래 19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를 누리던 영국·독일 등 서구 국가들이 70년대 이후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겪었던 현상이었다. 이게 2013년의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승자독식과 패자불복이 상수화돼 정국을 경색시키고, 국정을 마비시키는 통치불능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당시 서구 국가들은 제1당이 2, 3당과 연립해 정권을 유지하는 다당제나, 야당과 타협하는 분권형 리더십으로 ‘통치불능’을 극복했다. 하지만 한국처럼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권력구조에선 ‘통치불능’ 현상을 극복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국영(정치경제학)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제 구조에 더해 국방비 부담, 망국적인 지역패권주의, 미흡한 복지 등 3대 부담이 추가돼 ‘통치불능’ 수준이 서구 국가들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는 대통령이나 여야 지도자 개인의 유·무능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과 야당이 마음을 고쳐먹고 서로 대화한다 해도 승자독식형 권력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은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최대한 행사하려는 유혹을 받고, 모든 것을 빼앗긴 야당은 국정에 조금이라도 협조했다간 정권탈환 기회를 놓친다는 우려로 인해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결국 권력을 과감히 나누고, 갈등 사안을 타협으로 풀어나가는 길 외에는 답이 없다. 이는 곧 헌법체제의 변화로 이어진다. 지난 25년 동안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87년 헌법체제로는 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데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그 같은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 27일엔 여야 의원 116명으로 구성된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이 “내년 1월 중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쪽으로 개헌안을 발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모임을 주도한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과 민주당 우윤근 의원은 “분권형 권력구조로 ‘통치불능’의 덫에서 빠져나와 통일과 글로벌 비전까지 녹인 새 헌법을 마련할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개헌 논의는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특히 현직 대통령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개헌이 공론화되면 국정 주도권을 빼앗길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임기 말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꺼낸 적은 있지만 차기 대권주자들의 반발로 무산되곤 했다.

한편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직접 정치 쇄신안을 발표하면서 ‘집권 후 4년 중임제 개헌 추진’을 약속했다. 당선 이후엔 개헌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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