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산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바로 여기 남해 고올 동쪽 20리. 바닷물로 에둘리고 군함이 나드는 곳. 이 곳을 이름하되 관음포! 돌아가신 삼도통제사 증의정령의정 충무 이공의 순국하신 곳이다….』
순조32년(1832)에 당시의 대제학 홍석주가 관음포에 세운 유허비의 첫 구절이다. 관음비는 지금의 남해군 운천면 이낙산 자리. 비는 그 산 언덕 위에 아직도 우뚝 서 있다.
이낙산사는 바로 이충무공이 전몰하신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는 산모퉁이의 사당이다. 그래서 이름도 관음포에서 그렇게 바꾸어진 것이다.
충무공의 전사장면을 난중잡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중에 많은 적선들이 광주바다로부터 구름처럼 뭉치고 안개같이 모여 노량을 지나 왜교를 향하므로 두편 군사가 돌발하여 좌우로 덮쳐 학살과 돌을 퍼붓고 불붙인 나무를 마간 던지니 많은 적선 태반은 연소되고 우리 군대들이 목숨을 걸고 피나게 싸워 적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 관음포로 들어가자 날은 이미 샜다.
순신은 친히 북채를 쥐고 앞에 나서 적을 추격해 무찌르는데 대포를 가진 왜적이 배 뒤에 엎디었다가 순신을 향해 일제히 포를 쏘자 순신은 탄환에 맞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 급히 부하에게 명령하여 방패로써 몸을 가리게 하고 비밀에 붙여 죽었단 말을 내지 말도록 하였다….』
그 뒤를 행록에서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에 공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팔을 쥐고 곁에 섰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하는 말이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군.」「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성을 내면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그리고 또 시체를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는 수밖에 없읍니다.」
그리고는 곧 시체를 안고 방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종과 회·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신임이 두터웠던 부하 송명립 등도 알지 못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 가까이 와서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하고 외친다.
완이 뱃머리에 서서 울면서 「숙부님은 돌아가셨읍니다」하였다.…』
이곳이 바로 지금 이낙산이 있는 앞바다인 것이다. 영구는 고금도에서 아산으로 돌아갔다. 우리로서는 잊혀질 수 없는 곳이다. 그게 이제야 남해대교와 함께 되살아난 것이다. 민족적인 다시없는 「미란다」(miranda)….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