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의 계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양수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요즘 가뭄의 징조는 미리부터 물걱정을 하게 만든다. 가뭄을 제일 먼저 타는 것은 역시 농사이다. 농토가 메마르면 바로 우리의 식탁도 메마른다. 가뭄을 이기는 문제는 우리의 절실한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는 일찌기 농업국이면서도 양수나 관개의 기술이 신통치 못했던 것은 이상하다. 일설에는 오랜 봉건제 아래서 한 개인의 창의력이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작인은 보잘 것 없는 소작인 일뿐이지, 기술개발의 주역은 아니었다는 견해이다.
동남아 여러 나라의 풍물지를 보면 농부들이 인공양수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타일랜드」의 농부는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는 발짓을 하면서 물레방아 같은 것을 돌려 밑에서 위로 물을 뿜어낸다. 또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것도 있다.
이런 토속적인 풍경은 우리나라 시골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보다는 덜능율적이며, 허술해 보인다.
세계문명의 원류지대는 「나일」강·「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인더스」강·황하 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들 『5대하문명』은 그 기슭에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하여 사람이 살기 좋았던 환경 때문에 가능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는 오히려 『그 나쁜 환경』때문이라고 역설한다. 홍수 아니면 가뭄 등, 그 자연의 폭위가 반복되는 중에 인간은 끊임없이 응전하여 그것을 극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은 그 『도전과 응전』의 원리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사실 고대의 인류가 제방을 쌓고, 배수를 했던 유적들은 오늘에도 많은 감동을 준다. 「나일」강 연안의 여러 사원에는 큰 우물이 하나씩 있었다. 이 우물은 지하도로 「나일」강과 연결되어, 말하자면 수위계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술은 결국 인공적인 양수·관개기술을 발달시켰다.
「로마」시대(BC600∼AD400년)의 수리기술도 특필할 만하다. BC312년에 「로마」남방10「마일」의 언덕에 있는 수원에서 계곡을 건너는 장려한 「아치」모양의 개방수로를 건설, 「로마」전역에 물을 댔다. 그 설계자의 이름을 딴 『아피우스수도』는 세계수리사 의한 「페이지」를 빛내주고 있다.
현대의 기계문명은 「펌핑」(양수기)쯤은 별 문제가 아니다.
허허벌판을 상대로 조그만 양수기 하나가 물을 펑펑 뿜어내는 것을 보면 신기한 느낌마저 든다.
문제는 자연의 도전에 우리가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의지의 분발은 단순히 농민에게만 기대할 수는 없다. 당국의 허심탄회한 성의와 국민적인 협력이 아쉽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