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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관계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빚은 착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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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호 25면

지식의 과일을 먹음으로써 인간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루카스 크라낙이 그린 ‘아담과 이브’(1533). [사진 위키피디아]

순진함이었을까? 아니면 어리석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운명?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 대니얼 펄(Daniel Pearl)은 2002년 1월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도착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테러사건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일은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베일에 감추어진 테러단 두목을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는 처음 만난 이들을 순순히 따라나선다. 그들이 미국인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대니얼은 잊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또 한 가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을 잊었는지 모른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이고 그 역시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김대식의 'Big Questions' <18> 원인이란 무엇인가

잘 준비된 덫에 대니얼은 걸려들었고, 그를 납치한 자들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테러단원들은 복수만을 원했다.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이 느꼈던 설움과 불공평, 이스라엘·미국에 대한 증오. 그리고 그들 손 안엔 미국인이자 유대인 대니얼 펄이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대니얼. 복면을 쓴 누군가가 칼을 꺼낸다. 마치 어린 양의 목을 베듯, 능숙한 솜씨로 그는 아직 숨쉬고, 생각하고, 후회하고, 여전히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을 대니얼의 목을 자르기 시작한다.

대니얼의 참수 장면은 고스란히 유튜브에 올려진다. 호기심과 역겨움, 타인의 고통과 함께 이 무서운 세상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안도감…. 3분36초짜리 비디오를 보는 수많은 이들이 생각했을 감정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그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절대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기에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바로 대니얼 펄의 아버지 주데아 펄(Judea Pearl)이었다.

파키스탄 이슬람 테러단에게 납치당해 참수당한 다니엘 펄 기자. 작은 사진은 다니엘의 아버지인 천재 수학자 주데아 펄 교수

WSJ 기자 대니얼 펄은 왜 참수당했나
수학자 주데아 펄은 세계 최고의 논리학자 중 한 명이다. 컴퓨터공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튜링상(Turing Award)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세상은 논리적 인과성의 연결이다. 그렇지 않은가? 비가 오면 땅이 젖고 열쇠를 돌리면 문이 열린다. 아버지 주데아는 생각한다. 아들 대니얼은 왜 죽었어야 했는지. 단지 복면 쓴 정체 모를 그 남자 때문일까? 아니면 대니얼 펄이 카라치에 갔기 때문일까? 재앙의 진정한 원인은 이미 먼 과거에 뿌려진 것이 아닐까? 대니얼이 만약 기자가 아니라 과학자가 되었다면? 아니, 대니얼을 낳게 한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라면? 아니면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인들 때문? 2000여 년간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차별하던 기독교인들 때문? 바르 코바(Bar-Kokhba) 반란 후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예루살렘을 엘리아 카피톨리아(Aelia Capitolia)로 개명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때문?

어쩌면 역사는 존재의 원인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버둥거림인지도 모른다.

6000여 년 전 수메르인들은 여신 닌후르사그가 먼 동쪽에 ‘에디누’라고 불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에디누에 사는 동물을 돌보던 ‘엔키’는 어느 날 그 정원에서만 자라는 금지된 과일을 맛본다. 분노한 여신은 엔키의 갈비뼈(Ti 라는 동일 발음의 수메르 단어는 ‘갈비뼈’ 또는 ‘생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짐)에 극심한 고통을 준다.

다른 신들의 설득 끝에 여신은 ‘닌티’(수메르어 ‘닌’=여자, ‘티’=갈비뼈/생명)라는 여자를 만들어 엔키의 갈비뼈를 치료해주게 한다. 먼 훗날 에디누와 엔키는 히브리인들을 통해 천국 ‘에덴’과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이 되었고, ‘갈비뼈의 여자’인 닌티는 갈비뼈에서 태어났다는 이브(히브리어 ‘하와’·Hawwah=생명)로 되었을 것이다. 이브에게 건네받은 금지된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묻는다.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고. 간단히 “네” 또는 “아니요”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아담은 “이브가 건네주어서 먹었다”고 하고, 이브는 “뱀이 유혹해 받았다”고 한다.

결국 인류 최초의 인간들 모두 자신의 행동을 원인·결과로 연결된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에 대해 네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고 했다.

1)무엇인가? (예:신전). 2)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대리석). 3) 무엇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건축 기술을 통해). 4)무엇을 위하여 만들어졌는가? (신의 숭배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4대 원인’이라고 불리는 이 네 가지 질문은 사실 ‘4대 설명’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하다. 그중 세 번째 설명, ‘무엇에 의해 만들어졌는가?’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원인’이다.

고대인들에게 원인을 통해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신과 인간뿐이었다. 목표 없는 원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인 골리앗을 이기겠다는 목표를 가진 다비드는 돌을 던진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돌 자체는 아무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돌엔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목표는 결국 신이라는 단일 목표에서 온다. 그렇다면 우주의 모든 원인은 신에게서 창조된다고 가설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수많은 기계를 발명했다. 나사와 톱니바퀴와 도르래 같은 인간이 만든 기계는 신도 인간도 아니다. 목표를 가진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톱니바퀴가 돌아가면 그것과 연결된 그 다음 바퀴가 돌아간다. 하나의 물체가 또 다른 물체에 변화를 주는 원인이 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목표를 가질 수 없는 물체가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가만히 놔두어도 자연의 법칙을 통해 우주가 기계같이 잘만 돌아간다면, 프랑스 수학자 라플라스(1749∼1827)가 물어보았듯 ‘신’이라는 가설이 과연 필요할까?

라이프니츠(1646∼1716)는 신의 존재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그이기에 라이프니츠는 중대한 결론을 내린다. “신이 존재하려면 자연의 법칙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이건 무슨 말인가? 당구공이 다른 공을 치면 뉴턴의 법칙에 따라 두 공이 서로 움직이지 않는가? 자연의 법칙은 엄격히 존재하지 않는가?

라이프니츠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모든 물체들은 독립적인 단자(Monad)로 구성돼 있으며 “단자들은 창문이 없다”, 고로 단자들 간엔 인과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라이프니츠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미리 설립된 조화’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주 창조 당시 이미 먼 훗날 두 개의 당구공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만나도록 설립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관찰한다고 믿는 모든 인과관계를 라이프니츠는 그렇기에 단지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착각이라 생각했다.

자연의 법칙이 환상이 아니라는 증명은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불가능하다. 그 어느 증명도 미리 설립된 조화의 한 부분이라고 말해버리면 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뭔가 찝찝하다.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설명은 없을까?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고 주장해 탄압을 받았던 과학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진정으로 ‘위험한’ 인물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원인’이 더 이상 과학과 철학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처음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닭울음과 일출이 아무 관계도 없듯이
과학의 관심은 원인을 의미하는 ‘왜?’라는 질문이 아니다. 관찰한 현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책상에 앉아 만물과 변화의 원인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관찰하고, 관찰된 변화를 ‘수학’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날마다 비가 얼마나 오는지 그리고 땅이 얼마나 젖는지 측정해볼 수 있다. 반복된 실험을 하다 보면 비가 많이 올수록 땅이 더 젖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자연의 법칙엔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E=mc2]는 당연히 [mc2=E] 또는 [m=E/c2]라고 표현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만큼은 다르다. 비가 오면 땅이 젖지만, 땅이 젖는다고 비가 오지는 않는다. 더구나 아무 인과관계 없는 상호 관계도 관찰할 수 있다. 닭은 날마다 울고, 태양 역시 날마다 뜬다. 하지만 닭이 운다고 해가 뜨는 게 아니고 해가 뜬다고 닭이 우는 것도 아니다(닭은 신체 시계에 따라 울 뿐이다). 반복된 관찰을 통한 상호 관계만으로는 갈릴레이가 추구하던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아들을 잃은 주데아 펄은 결국 원인의 핵심은 “개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관찰된 상호 관계는 원인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들에 반복해서 개입하고 간섭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리는 비의 양을 조절한다면 비가 오는 만큼 땅이 젖는다는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땅을 아무리 젖도록 조작한다 해도 비는 더 내리지 않는다. 반복된 관찰이 아닌 반복된 개입을 통해 우리는 드디어 존재들 간의 상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반복된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존재는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단 한 번 만들어졌고 단 한 번 일어난 우주 창조 과정에 우리는 개입할 수 없다.

대니얼 펄은 2002년 1월 단 한 번 카라치에 도착했고, 단 한 번의 실수로 납치당하고, 단 한 칼에 그의 목은 잘린다. 무한의 반복과 개입. 수학자 주데아 펄은 이해한다.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해 세상에 낳고 키우고 가르치고, 그리고 어느 날 카라치에서 또다시 수천 번째 목이 잘려야만 사랑하는 아들 대니얼의 죽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라고.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했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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