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은행 연루된 대형 금융스캔들 터지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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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부정대출 사고의 현장으로 여겨졌던 국민은행 도쿄지점이 금융 ‘스캔들’의 진원지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일 금융당국의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불거진 현지 채용 직원의 자살 사건이 의문의 시발점이다. 국내 금융기관 일본 지점들에 대해 현지검사에 착수한 금융감독원의 행보도 주목된다. 도쿄 현지에서는 “부정대출 사건의 발단이 된 부동산 담보 대출은 국민은행 한 곳이 아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다른 은행들이 연루된 대형 금융 사고가 추가 발견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국내에선 비자금이 은행 경영진이나 정·관계까지 전달됐을 가능성을 검찰이 캐고 있다.

국민은행은 내우외환에 휩싸였다. 도쿄지점 사건 외에도 국내에선 본점 직원이 국민주택채권을 위조해 90억원을 횡령하다 적발됐고, 직원 인사를 둘러싸고 중국 금융당국과 마찰을 빚었다는 의혹도 나온다. 금융계 전문가들은 낙하산 인사와 계파 갈등에 휩싸인 국민은행의 내부 통제 실패와 감독 당국의 무능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

고위험 대출 시스템의 파국
구속된 국민은행 도쿄지점의 이모(56) 전 지점장은 2010년 초 부임했다. 2004~2006년 이미 지점장을 했던 이씨는 보기 드문 재부임으로 화제가 됐지만, 그해 지점의 대출 실적을 전년보다 38%나 늘려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12년까지 이 전 지점장은 매년 흑자를 냈다. 게다가 KB금융 임원들의 일본 방문 때마다 뛰어난 의전 능력을 발휘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최고위 경영진이 그를 공개적으로 본부장 승진 대상자로 거명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런 실적이 어떻게 가능했느냐다. 일본 현지 사정에 정통한 한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은행 도쿄지점 대출 자산의 상당수가 부동산 담보 대출이었다. 일본 은행보다 금리가 더 높은 한국계 은행 현지 지점의 대출을 누가 받겠나. 일본 은행들에서 대출을 못 받는 기업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전성보다 고수익을 노리다가 사고가 터졌다는 얘기다.

금융감독원과 검찰의 조사에 따르면, 이 전 지점장은 자격이 안 되는 기업들에 적어도 1700억원을 내줬다. 이 과정에서 담보 물건의 감정평가를 제대로 안 하거나, 본점이 정한 한도를 피하기 위해 돈을 나눠 대출하는 편법을 저질렀다. 실적만 노린 게 아니다. 100억원 가까운 돈을 수수료(리베이트) 명목으로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도쿄 현지에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출을 못 받는 기업·개인과 국내 금융기관 현지 지점을 연결하는 브로커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대출 관행이 비교적 오래됐으며, 다른 일부 은행 현지 지점도 관련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내에선 검찰이 이 전 지점장 등을 상대로 비자금의 조성 경위와 사용처를 추궁하고 있다. 조성한 비자금 중 적어도 20억원이 국내로 들어왔고, 일부는 추적이 어려운 상품권으로 바뀐 것에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상품권이 로비 자금이나 떡값의 형태로 국민은행 관계자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보고 ‘윗선’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

내부 통제·외부 감시 모두 실패
비자금 상납의 연결고리가 밝혀지지 않더라도 내부 통제에 실패한 KB금융 경영진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KB금융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전직 최고경영진들이 숫자로 실적을 보이라며 도쿄지점과 이 전 지점장의 성과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던 건 사실이다. 겉모습만 보고 내부를 철저히 통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허술한 감시 시스템은 본점 직원들이 장기간 저지른 국민주택채권 위조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베이징 현지법인 인사 갈등 문제도, 중국 금융당국이 잦은 인사를 자제해 달라고 공식 요청한 지 4일 만에 베이징 법인장과 부법인장을 교체하면서 불거졌다. 중국 금융당국의 요청이 국민은행 내부의 의사결정에 제때 반영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숭실대 금융학부 윤석헌 교수는 “KB 국민은행 내부의 통제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주인이 확실치 않아 외부 낙하산 인사가 이어진 게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금융에서 운용 위험에 대한 관리는 외부 인사가 알기 어렵다. 낙하산 인사가 올 때마다 줄을 서야 하는 현실 속에서 위험 관리 같은 기본 업무가 취약해진 결과로 본다”고 말했다.

부정 대출 사건을 미리 감시하지 못한 감독당국의 허술함도 문제다. 이번 사건 전까지 국민은행 도쿄지점에 대한 금융당국의 현장검사는 5년간 한 차례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해외 은행에 대한 전면적인 검사 후 감시의 눈길을 받지 않은 것이다.

이승녕 기자 franc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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