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전시의 문화인들(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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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문예중대>
현재 연극이나 영화에 관계하고 있는 40대 이상의 중견 연예인들은 6·25때 국방부 정훈국 또는 육군본부 휼병감실 소속으로 군의 지원을 받아 「유엔」군 및 한국군장병들의 위문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연예인들의 종군활동은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문예중대와 육군본부 휼병감실 원호과 소속의 군예대의 둘로 대별할 수 있다.
이밖에도 각 사단에는 사단별로 별도의 사단 군예대가 있어 많은 연예인들이 군속으로 있었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로는 휼병감실의 군예대 소속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다.
문예중대는 3개 반으로 다시 나뉘어져 극단반, 무용반, 가요반이 있어 군의지휘를 받으면서 일선은 물론 후방의 각 병원을 순회, 위문공연을 했으나 핵심은 이해랑 황정순 김동원씨 등 신협 소속 배우들을 중심으로 순수연극 활동을 계속한 반면 군예대원들은 연극·무용·가요 경음악단 등이 총 망라되어 「코미디」나 「팬토마임」 등을 곁들인 「그랜드·쇼」를 벌여 전진에 얼룩진 장병들의 피로를 씻어주곤 했다.

<『혈맥』공연 땐 「신협」단원 동원>
결국 문예중대는 연극으로, 군예대는 악극으로 위문활동을 벌였는데 출연 회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군예대의 경우 「유엔」군 장병위문만도 4백여 회에 달하며 또 대구 역 광장에서는 전선으로 떠나는 장병들을 환송하기 위해 매일같이 출연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때 조직된 연예인들의 단체는 전쟁이 끝나면서 모두 해체되었지만 명칭은 그대로 지속되어 현재에도 각 사단에는 군예대가 존속하고 있다.
다음은 당시 관계했던 연예인들의 회고담이다.
▲이해랑씨(당시 문예중대소속·현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56) <신협 소속 배우들은 9·28 수복 후 국립극장에서 재결단식을 갖고 국도극장에서 50년11월12일부터 7일간 협회재건기념으로 『혈맥』이란 연극을 공연했어요.
김승수 원작, 박진 연출의 이 연극은 3막 4장으로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아래 신협(신극협의회) 소속배우들이 대부분 출연했어요. 출연자들은 서월영 이해랑 박경주 박상익 김동원 고운봉 장훈 주선태 박상호 김정국 변영원 이춘사씨 외에 여배우들로는 복혜숙 김복자 송미남 유계선 백성희 심복수(재미) 이예민 김경애씨 등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선근 정훈국장이 나를 부르더니 육군에 문예중대를 조직하려는데 협조해 달라고 해요.
이렇게 해서 신협 소속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정훈국 문예중대가 조직되었는데 문예중대에는 극단 이외에 무용·가요 반이 함께 포섭되었어요.
문예중대의 극단 반 단원들은 『원술랑』 『뇌우』 등의 연극을 갖고 영·호남 지방의 극장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어요.
군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은 으례 일반공연이 끝난 밤 12시께부터 시작해서 새벽 2시께야 끝났기 때문에 지방공연은 무척 고되었습니다.
51년6월 우리 문예중대 극단은 비로소 맨 처음이자 마지막인 본격적인 전선위문공연에 나섰어요.
유치진 작, 이진순 연출의 『순동이』라는 연극을 갖고 나와 황정순 여사 등은 동부전선으로 가고 장민호 오사량씨 등은 서부전선에서 최전방 소대까지 들어가 위문 공연을 했어요.
52년 말 문예중대가 해체되어버리자 우리 신협 단원들은 공군 정훈감실 소속으로 되어 육군에서와 같이 쌀·피복 등을 지급 받으면서 공군 연예대가 되어 주로 대구에서 일반 공연과 함께 공군 위문공연을 휴전될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강유정씨(당시 문예중대소속·현 여인극장대표·44) <문예중대의 극단은 신협의 윤방일(고) 이해랑 오사량 박경주 최무룡 주동운 박상호 유일수 송미남 황정순 심복수 복혜숙 백성희 진낭씨와 나 등 연극배우들로 구성됐습니다.
무용단은 송범 김진걸 김문숙 주리 옥후현 최미연씨 등이 주역이었습니다. 그밖에 가요 반은 김선영 강준희 심연옥 금사향씨 등과 악단을 지휘한 김호길 김광수씨 등이 있었어요.
나는 당시 동국대학에 재학 중이면서 신협의 학생연극에 출연하던 병아리 배우였지요.

<『순동이』 일선공연으로 격찬>
문예대 결성기념공연을 끝내고 얼마 안 있어 1·4후퇴를 맞이했습니다.
문예중대는 분야별로 윤방일(극단) 송범(무용) 강준희(가요)씨가 대표로 정훈국과의 모든 연락관계를 책임졌고 특무상사가 한 명씩 배치되어 대원들의 급식·훈련 등을 지도했어요.
우리 문예중대는 1·4후퇴 후 서울을 탈환하고 아군이 진격해 올라가자 정일권 참모총장의 전선시찰을 동행, 동·서부 전선의 두「팀」으로 나누어 『순동이』라는 연극으로 일선순회 공연에 나섰습니다.
동부전선 「팀」은 극단에서는 윤방일 이해랑 박경주 황정순 박상호 나 등의 배우와 무대감독 김규대씨(고), 무용에는 김진걸 옥후현씨, 가수로는 금사향 김선영 심재동씨 등이었습니다.
서부전선으로 나간 「팀」은 오사량 최무룡 주동운 유일수 송미남 심복수 김상호 송범 주리 강준희 심연옥씨 등으로 구성됐구요.
동부전선 「팀」은 강릉과 주문진을 거점으로 삼척·양양 등지의 최전선부대까지 찾아가서 공연하여 장병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어요.
약 한달 만에 일선에서 돌아와서는 후방 군 병원을 다니면서 위문공연을 했습니다.

<낙하산 주워 어머니 치마 해줘>
이 무렵 가요와 무용「팀」은 생계가 곤란하고 고생스러우니까 각자 흩어져 부산 등지로 내려가 버렸고 문예중대에는 우리 극단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어요.
52년 초부터는 우리 극단도 공군 연예대로 가서 활동했는데 오사량 장민호 주동운 박상호 김규대 김상호씨 등은 공군 현역 사병으로 입대해서 현역 복무하면서 공연 때는 우리 연예대에 와서 함께 출연하곤 했어요.>
▲황정순씨(당시 문예중대소속·배우·48) <나는 국립극단 단원이 되어 첫 공연을 끝내고 병이 나는 바람에 입원해있던 도중 6·25를 맞이했어요.
6월25일 월급을 타려고 국립극단 사무실로 갔더니 수위가 이 난리 통에 무슨 월급이냐고 본체만체 하더군요.
월급도 못타고 저축해 놓았던 돈도 없어 할 수 없이 수색 쪽으로 나가 배추를 사다 팔아서 어머님과 연명해 나갔어요.
피눈물나는 고생 끝에 9·28수복을 맞으니까 부역연예인 심사를 끝내고 727부대(일명 문예중대)가 창설되어 신협「멤버」였던 이해랑 장민호 오사량씨 등과 여배우로는 나 송미남 강유정씨 등이 입대했어요.
모두 군복과 소총을 지급 받아 배재중학교에서 간단한 제식훈련을 받았어요.
부대조직을 막 끝내고 나니까 1·4후퇴가 시작됩디다.

<일반 공연보다 더욱 진지하게>
51년 『순동이』라는 연극을 갖고 전선 장병을 위문 할 때 나는 이해랑씨와 함께 동부전선으로 나갔습니다.
일선에서 무대가 없으니까 GMC「트럭」 2대를 맞대놓고 조명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해서 하루에 4회까지 공연을 했어요.
하루도 안 빠지고 출연하니까 동료들이 나한테 「탱크」부대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어요.
일선공연 중 길가에 떨어져 있는 낙하산을 주워다 어머님 속치마를 해드렸더니 아주 질겨서 그만이더군요.>
▲김동원씨(당시 문예중대·배우·57) <나는 피난을 못하고 북한 공산군에게 납북되어 가다가 순천에서 탈출해 서울에 와서 신협 단원들과 합류, 문예중대에 들어갔습니다.
문예중대 극단이 일반 공연 후 장병위문을 위해 심야공연을 할 때는 정원 5백여 명의 극장에 2천여 명씩 장병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는데 관람태도가 아주 진지해서 우리 배우들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공연할 때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1·4후퇴 후 다시 서울을 탈환했을 때 우리 문예 중대도 곧바로 올라와 서울시민 위안공연을 했습니다.
나는 전선 위문공연 때는 동행하지 않고 대구에 남아서 본부 일을 보았습니다.
신협 단원들이 전쟁기간동안 공연한 연극은 『원술랑』 『뇌우』 『순동이』 『햄리트』 『맥베드』 『붉은 장갑』 『수원군』 『오델로』 『수전노』 『불꽃』 『윌리엄·텔』 『처용의 노래』 『여성전선』 『향수』 『나도 인간이 되련다』 『은장도』 등 창작극과 번역극 등 20여 편에 달했습니다. 그밖에는 문예중대가 되기 이전 신협이 이미 상연했던 연극들도 많이 재 공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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