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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전시의 문화인들(2)|육군 종군작가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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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피난 생활이 시작된 지 몇 달 안 되는 51년 5월26일 저녁6시 대구시내 아담 다방에는 육군정훈감 박영준 대령을 비롯한 서너명의 장교와 20여명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이들은 조용히 「육군 종군작가단」이라는 모임을 공식으로 결성한 것이다. 이보다 약 2개월 전인 3월15일「공군 구락부」라는 「공군 문인들」모임이 발족한 후여서 이는 두 번째의 작가들 조직이었다.
육군 종군작가단은 처음에 최상덕(단장), 김송(부단장), 최태응·박영준·이덕진(이상 상임위원), 정비석·김영수·장덕조·임긍재·조운암·김이석·박인환·이봉구·성서조·양명문씨 등 15명으로 구성했다가 차차 단원을 늘려갔다.
작가단은 결성한 후 첫 사업으로 ①매월1회 일선 종군 ②종군기 발표 ③종군보고 강연회 개최 ④종군 문집 발간 등을 내세웠다가 단원이 확충되면서 사업도 ①기관지 발간 ②종군 문학 방송 ③연극 발표 ④지방순회 강연 ⑤군가 작곡 등으로 확대되었다. 51년 5월26일의 15명으로 작가단을 결성한 다음 12월1일에 이들의 회의장소처럼 되어버린 아담 다방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1차로 단원을 보강했다. 이 때 가입된 인사들은 김팔봉·구상·장만영·박귀송·박기준, 작곡가 김동진씨 등이며 이밖에·황준성·김현송·노준석씨 등 출판 관계자들을 새로 맞이하여 기관지 발행의 업무를 맡기는 한편 김영학·추정석·김동진씨를 대구방송국에 출연시켜 매주30분씩 정기방송을 담당하도록 했다.

<만화가·작곡가도 가입하고>
52년 5월16일에는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만화가 김용환씨를 비롯, 윤석중·유치환·손소희·하대응·이정우씨 등을 새로 가입시켜 육군 종군작가단은 순수한 문학만이 아니라 작곡가·만화가 등도 포함된 문화단체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단원 수는 30여명을 헤아리게됐다. 56년 국방부 정훈국이 발행한 「정훈대계」에 의하면 작가단의 업적은 일선 종군 총2백20회, 종군 연일수 9백24일, 대도시 종군보고 강연회 8회, 문학의 밤 14회, 기관지 발행7회, 문인극 5회 (대구 부산 서울), 지방순회 강연 2회, 정전반대 시국강연 1회, 「육군의 밤」방송 6회, 벽시 및 시화전 2회, 부대가 및 군가 작사·작곡 수십편 등으로 되어 있다. 다음은 작가단에 관계했던 문인들의 그 무렵의 이야기.
▲박영준씨(당시 육군 종군작가단 사무국장·현 연세대 교수·62) <육군에 종군 작가단이 생기게 된 것은 51년1월부터 정비석씨와 내가 둘이서 정훈감실에 문관으로 일을 보게되면서부터 싹 텄다고 보아야겠지요. 당시 정훈감실의 일이란 군인들을 상대로 한 책자 발행과 신문 발간이었어요. 특히 일선 장병을 위한 오락물로는 만화가 큰 인기를 끌고있어 굉장히 많은 양을 만들어 일선에 보내곤 했습니다. 만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바우 김성환씨와 화가 이순재씨 등 화가들도 함께 했지요.
이처럼 정훈감실의 출판관계 업무가 활발해지자 작가들은 원고 때문에 감실에 자주 드나들게 되어 종군 작가단이 결성된 것입니다.
작가단의 사업은 물론 군의 지원이 없으면 전혀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직업도 없이 고생하고 있는 작가단에 육본에서는 군복과 쌀 배급 등을 주는 등 많은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각 군기관 잡지에 단원들의 작품을 싣도록 알선해 주었고, 문인극과 기관지 「전선문학」의 발간은 순전히 군의 지원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작가」가 목수로 오해받기도>
일선을 종군할 때는 해병들이 「작가」라는 뜻을 잘 몰라 우리가 목수로 오해되어 검문을 받은 적도 있어요.
단원 중에도 나는 거의 전 전선을 다 돌아볼 정도로 종군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일선 사단을 방문하면 최전방까지 안내 받을 때도 있지만 전투장면을 목격하기는 힘들고 전투가 끝난 다음의 뒤처리 과정, 포로와 중공군 시체처리, 또는 아군의 피해 상황 등을 볼 수 있는 게 고작이고 전투경과나 내용은 사병들 입을 통해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전쟁중의 급식이나 수송형편은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였지만 일선에서 사병들이 애쓰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와서는 이를 후방국민들에게 알리고 또 이것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무감을 느끼게 하여 많은 작가들이 일선 종군을 지원해 나섰던 것이어요. 작품은 기관지 「전선 문학」이나 국방부에서 발행한 「국방」또는 공군의 「코메트」, 해병대의 「사정보」등 군 출판물이나 종군 문고를 통해 발표했어요.>
▲김팔봉씨(당시 육군 종군 작가단 부단장·소설가·70) <나는 작가단이 결성된 지 약6개월이 지난 다음에 가입했어요. 이 무렵 작가단의 구성은 승리일보 편집국장인 최상덕씨가 단장을 맡고 나와 구상씨가 부단장을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일은 사무국장인 박영준씨와 도맡아 했어요.
내가 처음 일선을 종군한 것은 51년12월께 이었어요. 하루는 이덕진씨가 찾아와 육군 총참모장인 이종찬 중장이 중부 전선의 2사단과 6사단을 방문하고 종군기를 써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고 해요.
미국의 어느 잡지에 실릴 글이라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덕진씨와 동행하여 처음으로 일선을 시찰했습니다. 그 때 6사단은 인제에, 2사단은 금화에 있었는데 한곳에 이틀간씩 5일만에 2개 사단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종군기를 써서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원고를 육본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기사가 어느 잡지에 실렸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나는 적 치하에 그 자들로부터 소위 인민재판을 받은 것 때문에 지금도 다리가 불편한데 그 무렵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모두 8번 가량 일선을 다녔고 5번 가량 부산·광주·전주 등으로 강연회에 참가했어요.

<시 낭독회 열어 후방 지원 보여>
전선을 다녀온 후의 종군보고 강연회는 대구에서만 크게 두 번 있었다고 기억되는데 종군 작가단의 월례회가 일반의 방청이 허용되어 강연회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어요. 이 모임에는 육군 총 참모장도 가끔 나와서 연설을 했어요.
일선을 방문했을 때는 장교들과 사병들을 「홀」이나 광장에 모아놓고 좌담회 형식이 아니면 강연으로 후방의 국민들은 전방의 군인들을 적극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이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선 장병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돌아와서는 건의할 것은 당국에 건의하고 후방국민들에게 알려줄 것은 강연회 때 이야기하여 전후방의 교량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시인들이 일선을 방문할 때는 시 낭독회도 열었구요>
▲정비석씨(당시 육군 종군 주간단원·소설가·62) <내가 종군을 시작한 것은 작가단이 결성되기 전이었습니다. 9·28 수복된 지 얼마 안 되어 하루는 수하동의 내집에 6사단 정훈장교인 장인환 소위와 당시 연합신문 전무였던 임주빈씨가 찾아왔어요. 6사단(사단장 김종오 준장) 이 북진하는데 북진기록을 남기기 위해 동행하자는 것이었어요. 적치 3개월 동안 하도 고생을 했기 때문에 나는 식구들 못 가겠다고 하니까 임씨가 식구들은 책임질테니 안심하고 가라고 해서 나섰어요.
50년 10월1일 강원도 회양에서 6사단과 합류하여 원산에서 평원선을 따라 맹산·성천으로 해서 평양에 들어갔다가 순천·희천을 거쳐 압록강 앞 초산까지 들어갔어요. 11월23일로 기억되는데 사단 본부는 희천에 있고 선발대가 초산에 먼저 들어가 사단본부도 다음날 희천에 들어가게 되어있었어요.
이날 밤 나는 몸살기가 있어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사단 정훈부장이 와서 사단본부보다 앞서 초산에 들어가자고 합디다.
그러나 나는 열이 나서 그날 밤에는 못 가겠으니 다음날 새벽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정훈부장은 동행했던 사진사만 데리고 떠났어요.
잠이 들려는 참인데 작전 참모로부터 정훈 부장을 찾는 전화가 왔어요. 그리고는 30분 안으로 이동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평양 거쳐 초산까지도 동행>
철수하는 것으로 알고 부랴부랴 떠났습니다. 이날 밤 6사단은 희천에서 온정리를 지나 구장까지 약1백40리를 후퇴했어요. 6사단이 온정리를 통과한지 불과 1시간만에 중공군이 온정리를 들이쳤어요. 이날 밤에 초산에 들어간 사진사 등은 결국 나오지 못했어요.
서울에 들어온 것이 12월26일께 이었는데 1주일도 채 안되어 대구로 후퇴했습니다.
대구에 오니 정훈국에서 나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영준씨가 먼저 와 있었는데 정훈국의 일을 보면서 작가들이 더 필요하다고 하니까 나를 추천해 놓았던 모양입디다.
이렇게 박영준씨와 내가 정훈국의 일을 보게된 것이 작가단이 결성된 동기였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작가단의 일원으로 그 후에 다녀온 일선은 대부분 단체 행동이었습니다.>
주요일지(1952년 12월29∼31일)
※29일▲불군과 호군, 「하노이」서북방서 격전 ▲「밸덴버그」미공군 참모총장, 소 공군력 강화를 경고.
※30일▲「미주리」전함, 청진에 함포 사격 ▲휴전회담의 공산군 연락장교, 「유엔」군이 중립지대 침범했다고 항의 ▲이 대통령 방일시 일본 지도자와의 회담계획 발표 ▲길전 수상도 회담용의 공표 ▲「처칠」수상 방미 시사.
※31일 ▲전선 소강 상태 ▲중·소 공동 관리하의 장춘 철도를 중공에 이양 ▲「트루먼」대통령, 기자회견서 세계평화 낙관.
◆정정=본연재 제436회 본문 기사의 l·4후퇴 때 월남한 문인 중 이인석씨는 「1948년 월남』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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