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유교정치사상은 중국서 들어온 것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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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사연구회 월례발표회가 17일 하오2시 서울대문리대 시청각교실에서 열렸다.
다음은 이 발표회에서 주제를 발표한 김철준 교수(서울대문리대)의「통일 기 신라지배체제의 일성격」의 요약이다.
김철준 교수는 신라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지금까지 다루어진 외적영향이 아닌 내적 성장과정을 통해 지배체제의 유교적 성격을 분석했다.
『위지동이전』『삼국사기』『삼국추사』등 사료들을 통해서는 신라기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신라의 유교정치 숭상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아닌 내부적 필요성에 의해서 발전한 것이며, 또 통일기 이후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혈흥왕 순수비에서도 이러한 유교사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불구적인 왕으로 알려진 혈평주기에 오히려 화랑도와 같은 국가친·사회적「모럴」이 확대되 되면서 유교사상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 을 진행함에 따라 이러한 유교사상은 더욱 확대됐고 통일초기에는 육두품도 유교적 정치이념에 호응을 보였다.
김춘추 김유신을 중심으로 지배 세력이 재편성되고 또 통일 후 대단한 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정치사상의「스케일」이 커져 유교적 정치사상이 계속 발전할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중기 이후에는 이러한 유교정치 사상이 왕권강화를 위해서만 이용됨으로써 차차 모순을 낳게됐다. 골품제도등 사회성격의 한계성, 육두품 출신의 문제, 족벌, 지역적 도렴에 따른 결합을 갖게된 것이다.
한정된 관습에 혈골은 늘어만 갔고 육두품은 그이상의 신분을 얻을수 없었다.
통일초기에는 백제·고구려의 유민까지 잘 포섭 되었지만 일단 안정된 후에는 주족중심으로만 됨으로써 지방세력의 반발을 사게된 것이다.
유교정치 사상은 지배자에 대한 충성만을 요구하는 공허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여기에 김·박양씨가 각지방에 장원을 형성, 중앙에 항거 함으로써 중앙관서의 모순을 촉진했다.
이와같이 통일신라의 유교정치 사상이 말기에 들어 제대로 이해되지 못 함으로써 신라는 몰락의 길을 걷고 후삼국의 탄생을 보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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