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지원 작전(19)|노무대(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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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속칭 「지게부대」라고 불린 한국 고유의 노무대는 6·25전쟁 동안 운송·보급·잡역을 겸한 1인 3역을 담당했으며, 특히 산악 고지전을 치르는데 있어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군은 전투를 전개하면서 한국이 대체로 산세가 험한 지역임을 알고 포탄·급식 등의 보급품을 운반할 「인력」을 한국 고유의 「지게」에서 구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미국의 노무자 수요는 월남 청장년들이나 부동 피난민들의 자원 입대로 쉽게 충당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미군은 처음에 부대 내에 CTC(민간 수송대)를 두고 한국인 노무자들을 받아들여 약간의 보수와 숙식을 제공하고 작전 지역의 철조망 가설, 부대 주변의 경비 및 미화 작업 등에 필요한 용역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CTC대원들은 l5, 16세의 소년에서부터 50세에 가까운 노인과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그 성분이 아주 다양했다.
전쟁 초기의 노무자들이 작업에 주로 지게를 사용하는 것을 본 미군들은 이들을 A「프레임」부대(지게부대)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각 미군 부대에서는 CTC의 작업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만족해했다.

<원칙으로 미군 부대에 배치>
51년초부터 미군 당국은 그 동안 비공식적으로 적당히 추진해 오던 CTC노무자 모집을 벽보를 붙여 공개적으로 하고 8군에서는 한국 정부와 육본에 공식 교섭을 추진, 미군 작전 용역 부대로 KSC(한국 노무대)를 창설해서 징집과 지원으로 대원을 충원했다. KSC의 징모와 부대 지휘는 한국군 당국이 맡아 했고 보급과 보수·작업 지휘 등은 미군이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 산발적이고 소규모였던 「용역 병력」은 3개 노무사단으로 증강되어 부대 지휘를 국군 현역 장교들이 담당함으로써 KSC는 군번과 무기는 없지만 「준군대」로 변모했다.
KSC는 원칙적으로 미군 부대에만 배치됐지만 미군단에 소속돼 있는 한국군 사단에서도 근무했다. 전쟁 중 노무대원에 얽힌 애화나 일화는 많다.
다음은 당시 중학 4학년생으로 부친과 함께 노무대에 복무했던 부자 노무자의 이야기.
▲이상영씨(당시 제 103노무사단 노무자·현 금강 융단 주식회사 사원·38)<나는 개성 중학 4학년 재학 중 6·25가 일어나 충남 온양으로 피난을 내려갔다가 51년 4월 거리에 나붙은 벽보를 보고 아버지와 함께 ctc에 입대를 했습니다.
당시 43세였던 아버지는 고향에서 국민학교 교장을 하시다 나를 데리고 내려왔는데 연고자도 없고 해서 굶기를 밥먹듯 했어요. 온양 경찰서로 들어가 입대를 자원했더니 아버지는 연령이 해당되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안 된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떨어질 수 없으니 입대 시켜 달라고 거듭 간청했더니 봐주더군요.
온양·서천 지방에서 입대하는 사람들과 갈이 미군 헌병의 인솔로 화물차를 타고 가평에 도착하니까 미 제7사단 17연대 「트럭」들이 나와서 인원수를 점검한 후 경기도 가평군 현리로 싣고 들어갑디다.
우리 노무대는 여기에서 매설했던 지뢰 철거와 철조망 구축 작업을 두달쯤 하고 미 7사단을 따라 중부 전선 적근산 지역으로 이동했어요.
이때까지는 쌀·오징어 등의 급식을 줄뿐 피복도 안 주어 나는 학생복을 그대로 입고 작업을 했어요. 작업 지휘는 미군 노무 장교 준위가 나와서 하데요.
적근산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51년 7월말께부터 우리 미 제7사단 노무대는 제103노무사단에 소속됐는데 현역과 예비군 장교들이 지휘관으로 나오더군요. 이 때부터는 규율이 엄해지고 군대와 다름없는 부대 체계를 갖추었어요.
그리고 전선 투입 전 화천에서 부대 정비를 하는데 지게를 하나씩 보급해 줍디다. 또 고령자들은 후방근무나 제대를 시킨다면서 추려내구요.
나는 늘 아버지와 앞뒤에 꼭 붙어 있었는데 화천에서 전방으로 출발할 때 떨어지고 말았어요.
앞에 서 있던 아버지가 옆 사람이 빠지는 바람에 그 자리로 나가 나와 줄을 달리해 버린 거예요.
전방으로 달리는 「트럭」위에서 애를 태우며 뒤에 오는 차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끝내 아버지는 안보이더군요.
적근산에서는 지게로 고지 전투 부대에 탄약·포탄·급식 등을 운반하는 작업을 주로 했어요. 전투가 치열할 때는 주야 계속 「벙커」로 포탄을 날랐는데 때로는 미군 대대장까지도 직접 자기가 탄약상자를 운반했어요.
한번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데 우의도 없이 보급품을 운반하니까 옆의 「이디오피아」 중대서 나를 데려다가 자기들 「벙커」속에서 비를 피하게 해줍디다.
결국 나는 과로한 작업과 아버지 소식을 탐문하다가 지쳐서 병이나 눕고 말았어요. 행정 장교인 안전주 소위가 누워 있는 나를 보더니 학생이 어떻게 해서 노무대를 왔느냐면서 대대 본부로 데리고 가데요.

<부자 대원 다섯 달만에 재회>
그런데 차를 타고 본부로 가는 도중 다른 KSC중대에 들렀다가 CTC때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을 만나 고대하던 아버지 소식을 듣게 됐어요. 아버지도 전방에와 근무를 하다가 나이가 많다고 1주일 전에 후방으로 전속됐다고 합디다.
51년 늦가을 미 7사단이 인제로 나와 백암산에 주둔하게 되자 우리 KSC도 따라 나왔습니다.
나는 건강을 회복하고 중대 본부 인사계를 보면서 나무나 하러 다녔는데 하루는 휴가를 다녀온 부대 예비군 장교들이 난로가에서 『춘천에는 국민학교 교장을 했었다는 미군 부대 노무자가 방을 얻어 놓고 출퇴근을 하면서 근무하더라』는 얘기들을 하고 있습디다.
귀가 번쩍 뜨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뛰어들어가 얘기를 자세히 들어봤더니 아버지임에 틀림없더군요.
이튿날부터 아버지가 근무한다는 미공병단 KSC로 매일같이 편지를 썼지요. 13번만에 답장을 받았는데 『나는 네 편지를 모두 잘 받는데 왜 너는 못 받았느냐』는 거예요.
이렇게 돼서 나는 대대장의 특별 배려로 휴가를 나가 춘천에서 5개월만에 아버지를 만나 뵙고 돌아왔습니다.
51년 겨울 상비군인 2명이 우리 KSC에 찾아와 경리일을 도와줄테니 밥만 먹여 달라고 사정해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1주일만에 격전이 벌어져 인력이 부족하니까 이들도 포탄을 지고 나갔는데 도중에서 적 포탄을 피하다가 파편을 맞고 즉사해 버렸어요.
전황이 긴박해서 우리가 그대로 현지 매장을 해주고 말았는데 원칙은 노무자들이 전사하면 화장을 시켜 사단 안치소로 보내게 돼 있었어요.

<병역 기피 위해 들어오기도>
52년 3월에는 미 7사단과 함께 문산으로 나와 휴전회담 전진 기지 옆에 주둔하면서 이 지역의 미화 작업을 주로 했습니다.
이해 가을 우리 노무자들이 기지 옆에 있는 사과밭으로 사과를 따먹으러 들어갔다가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미군이 나가라고 손짓을 하니까 사병인줄로 알고 욕들을 했는데 알고 보니 미군 준장이었어요.
그 미군 장군이 우리 부대로 연락을 해서 모두 기합들을 받고 혼났지요.
▲송인석씨(당시 재103노무사단 감찰 법무부 선임하사=일등 상사·현 명순겸 변호사 사무실 근무·43)<나는 학도병으로 입대해 7사단에서 근무하다가 52년 3월 제103노무사단으로 갔습니다.
사단장 이량 대령을 비롯한 참모장, 고급 부관 등은 현역이었지만 그 밖의 연대장·대대장·소대장 등은 모두가 예비역 장교들이었어요.
당시 춘천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제103노무사단은 중동부 전선의 미군 부대를 지원해줬읍니다.
노무자들은 대부분이 징집 연령이 넘은 30세 이상의 시골 농부 출신들이 많았는데 입대와 동시에 막바로 일선 부대로 배속됐어요. 그러니까 훈련이나 교육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겁니다.
노무대원들 중에는 피난 생활에 쪼들리는 지식인들과 간혹 병역을 기피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단 사령부는 미군과 자원 입대해서 올라온 노무자들을 명단만 작성해 놓고 일선으로 배치해 뒀는데 마치 훈련소 배출대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재미본 사람들 재복무 일쑤>
KSC대원들에 대한 보급과 봉급은 미군이 담당, 미군 경리 장교가 돈 보따리를 직접 들고 와서 나눠줬어요. 노무자 봉급은 한국군 현역 하사관보다 나았습니다.
KSC의 편제는 현역 사단과 같았으나 병력 수가 약간 더 많았어요.
우리 103노무사단은 4개 연대로 편성돼 있었는데 미군 1개 연대에는 1개 대대, 한국군 1개 연대에는 1∼2개 중대씩을 배치했어요. 부대 운영은 사실상 양구·인제·금화·화천 등지에 나가 있는 연대 본부가 거의 독립적으로 해 나갔구요.
그러니까 미군 부대의 작업 협조나 충원 문제는 연대가 직접 일선 사단과 연결돼 추진했고 노무대 지휘는 KSC전방 소대장·중대장들이 거의 전권을 행사했습니다.
노무자들의 복무 기간은 2년이었지만 미군 부대에 근무하며 재미를 본 사람들은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거나 자원해서 계속 근무하기도 합디다.
심지어는 새로 들어오는 노무자들에게 돈을 주고 자기가 대신 계속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우리 103사단은 54년 4월 해체돼 제101노무사단에 편입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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