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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성격과 특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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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27」총선은 제4공화국의 첫 의회를 구성하는 선거.
종래의 국회가 비생산적이었다는 반성에서 비상 국무회의는 능률 위주의 국회법을 새로 만들었다.
8대 국회가 여야간의 의석 차를 좁힌 균형국회였다면 9대 국회는 여당에 안정세가 부여된 국회라 할 수 있다. 여당의 안정세는 새 선거제도에 의해 법으로 보장되다시피 했다. 지역구의석의 반(정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석 판도는 9대 국회의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하고 있다.
종래와 같은 여야의 극한대립이나 야당의 정권투쟁 같은 것은 많이 지양되어 9대 국회는 「유신」에 맞춘 능률 위주가 될 것이다.
이런 국회를 구성하는 2·27 총선에서 우리는 중 선거구제, 선거운동의 엄격 규제를 처음으로 시험했고 무소속 후보도 오래 만에 다시 대했다. 이 선거가 담은 특징과 문제점도 그 만큼 많다.
○…새 선거법은 낭비적이고 타락을 유발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했으며 「2·27」 총선은 이 법에 의한 첫 선거였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돈 안 드는 깨끗한 선거」를 목표로 했고 선거운동은 어느 때보다도 조용한 편이었다.
그러나 조용한 분위기와 공명선거 사이가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선거법은 누구나 선거에 관해 단순한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권자들은 선거에 관련된 얘기만 해도 붙들려 가지나 않을까 해서 아예 함구했다.
새 선거법이 「조용한 선거」를 강조한 나머지 선거운동을 지나치게 규제함으로써 공직선거의 기본이 되는 후보자 알림이 미흡했다.
법적 운동기간은 18일이지만 실제로는 2주간 정도였고 그것도 후보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었다.
선거운동이 ①합동연설회 ②선전벽보 ③선거공보에 국한되었으므로 후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합동 강연뿐이다. 이 합동강연도 시·구는 2회, 군 지역에서는 3회에 불과하여 종래 보다 2배로 늘어난 넓은 선거구에서는 너무도 부족했다. 최대 선거구인 서울 성북구의 경우 선거인 53만 명인데 단 2회의 연설회에 모인 청중은 6천명에 불과했다.
선관위가 인구 1백 명에 1장 꼴로 선전벽보를 붙이고 가구마다 한 차례 선거공보를 보냈지만 거기에 기재된 것은 후보자의 사진과 경력 정도.
이 같은 선거에서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후보자에 관해 충분한 이해를 갖고 투표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당 후보와 무소속 후보간의 차등도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기탁금의 차이(정당후보 2백만 원, 무소속 3백만 원)는 어느 정도 무소속의 난립을 막는데 효과를 보았다고 하겠으나 득표활동에서 정당후보에 대한 「프리미엄」이 너무 컸다.
정당활동은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해서 정당후보들은 이른바 「당원 단합대회」와 「당원 교육」을 통해 집단 득표운동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정당의 지방당부 활동이 이번처럼 활기를 띤 일도 드물다.
그러나 무소속은 이런 일이 허용되지 않아 사조직을 점선으로 활용하는 것뿐이었다. 새 선거법은 돈 안 드는 선거를 목표했으나 실제로 후보자들이 법정 경비만으로 선거를 치렀는지는 의문이다.
선관위가 결정, 공고한 선거비용 제한 액은 선거구에 따라 후보 당 2백 80만원에서 6백만 원선 이었다.
개인 연설회가 없어지고 후보자와 그 운동원이 유권자와 접촉하기 어려운 여건에서 돈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정당활동에 쓰여진 돈은 선거기간 중 엄청나게 늘었을 것 같다. 여하튼 음성적으로 뿌려진 돈을 계산할 수는 없지만 돈 안 드는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동대문구와 목포 등 일부지역에서 사전투표 사례가 적발됨으로써 투표 참관인 제도에 대한 평가문제가 새삼 제기되었다.
새 선거법은 개표에 후보자 참관인을 참여시킨 외에 종래의 각급 선관위원·투표 참관인 중 정당 추천「케이스」를 모두 없앴다. 정당의 투표참관인 제도를 그대로 두었을 경우 동대문구나 목포에서와 같은 사전투표가 가능 했겠느냐를 생각할 때 참관인 제도에 대한 재평가가 요청되고 있다. 선거에서의 정책제시가 적었던 것도 한 특징이다.
종래에는 선거를 정당이 주도해 정당의 지원이 선거운동의 큰 부분을 차지한 탓으로 정책대결의 모습을 띠었으나 새 선거제도에선 정당의 공공연한 지원이 금지되어 기껏 야당끼리의 선명 논쟁이 있었을 뿐이다. 이젠 선거가 정권교체와는 무관해진 점이 정책대결을 후퇴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의 제시와 비판 대신에 후보자들끼리의 인신공격이 두드러진 점은 반성해야 마땅할 것 같다.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거구가 몇 개의 시·군으로 형성됨에 따라 지역감정이 크게 노출된 것도 큰 문제점이다.
후보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출신 시·군에서 몰표를 호소했고 유권자들 중에도 공공연히『우리 군 출신 후보가 당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출신 시·군이 각각 다른 후보 지역에서는 선거전이 시·군 대항전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조남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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