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3)<제31화>내가아는 박헌영(11) 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공산당입당
스무살나던 해에 박헌영은 일본을 거쳐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상해에 발을 디뎠다.
경성고보를 졸업한 직후엔 미국에 가고 싶어하던 박헌영이 어떤 경로로 상해에 갔는지, 또는 처음부터 상해를 가기위해 짐짓 미국에 가자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뭏든 박은 1920년 9월께 상해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상해는 세계 여러인종이 모인곳으로 번화로운 국제도시를 이루었다.
지금 인구는 1천82만명(70년 「유엔」인구통계연감)으로 동경을 훨씬 능가했다지만, 당시인구만 하더라도 2백여만명으로 세계 8위의 인구수를 지니고 있었다.
상해는 당시 1919년 3·1운동이래 국내인사들이 속속들이 망명해 불조계 하비노에 이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활동하고 있던때였다.
상해에 도착한 박헌영은 영어터득에 미련을 버리지못해 그곳의 기독교청년회부실강습소에나가면서 계속 영어공부를 했다.
그는 강습소에서 역시 영어를 배우고 있던 임원근을 알게됐다.
경기도 개성군 림한면 하조강리 출신인 임원근은 서울 선린상업을 나와 2년동안 일본경덕대학에서 수업하다 상해로 건너온 사람으로 박과는 동년배이었다.
둘이는 이내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들은 그 무렵 이동휘파의 상해파 고료공산당에 대항해서 재노한인의 유지 안병독 김만겸이 「이르쿠츠크」파의 조종아래 상해에 만든 세칭「이르쿠츠크」고려공산당 상해지부의 산하에 들어가 공산당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상해지부는「이르쿠츠크」에서 열린 한인공산주의자 대회에 상해파 대표로 참석했던 안병찬이 상해로 돌아와 l92l년 7월 반 이동휘파의 집회를 열고 「이르쿠츠크」고려공산당지부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해지부란 사실상 「코민테른」의 공작원이고 「러시아」이민출신인 김만겸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상해에 지부를 조직한것은 당시 국내에서 많은 망명객들이 상해에 들어와 있었기 매문에 그들을 포섭, 국내 침투공작을 도모하려한 것이다.
김만겸의 야심은 대단했다.
연해주 이민출신인 그는 이미 19l1년 「블라디보스트크」신한촌에서 한인협회를 조직했으며 1919년2월15일에는 「러시아」내 한인의 민족통일 전선인 대한국민의회 부회장을 역임한 관록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기 「볼셰비키」집단의 조직훈련을 제대로 받은 골수 공산주의자이었던것 같다.
김만겸은「코민테른」의 재정적 후원으로 사회주의 연구소란 위장간판을 내걸고 청년조직에도 손을 썼다.
김만겸은 국내파계의 여운형도 포섭했다.
박헌영이 공산당에 가입하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그는 공식적 기록으로는「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의 평당원으로 공산당 활동에 처음 발을 디뎌놓게된다.
당시 조직된 상해지부 위원은 위원으로 김만겸 여운형 조동우 등 3명이었으며 평당원으로박헌영 김태연(김단야) 임원근 최창직 김원경 양혜 안공근 등이 입당비준됐다.
당의 실권직책인 책임 비서직은 물론 김만겸이 맡았다.
소위「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조직 완료한 이들은 1주일에 한번씩 김만겸의 집에서 정기회합을 가졌다.
그리고는 주로 민족주의파와 공산파간에 범민족 전선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나서자는 대립정 대책을 협의하곤 했다.
당시의 사정을 잘 알고있는 초창기의 원로 공산주의자 김급말씨(81·전북부안군 백산면 대수리·생존)는 1920년 겨울무렵 박헌영과 같은또래의 김단야 임원근 허정숙(현 북한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서기국장) 등 20대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공산당에 입당신청을 했으나 자신은 반대했었다 한다.
김씨는 다른 사람들이 박등 젊은이들이 사회추의 이론에 밝고 열의가 있으니 일단 입당시켜주자고 했으나 『갓 공산주의 운동에 발을 디디려는 젊은이들인데 표면 활동도 지켜보지 않고 어떻게 비밀조직에 가입시키려 하느냐』고 반대했었다는 것이다.
「반세기의 말썽꾸러기」가 됐던 박헌영의 공산당 활동은 이때부터 처음 시작하게 됐다.
그는 상해에서는 왕양옥이란 중국명을 쓰며 김만겸이 당시「코민테른」에서 얻은 돈 백원을 자금으로 영문만 공산주의 ABC(부하린저)5백부, 공산당선언 l천부, 직접행동(영국노동당Direct action) 1천부를 각각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는 이 불온 선전물을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의 서울의 김고현(2대국회의원·이승만박사암살기도사건 주동자) 앞으로 밀송하는일을 도맡아 했다.
학교때부터 익힌 영어실력을 아마 그때 불온서적의 번역에 써먹은 모양이다.
이 번역활동으로 박헌영은 상당한 평가를 받게됐다.
한편 박헌영은 상해에 도착한 이듬해인 1921년4월부터 상해 상과대학에 적을 두어 22년3월까지 수학했다고 전해졌으나 사실온 상해에 머무르면서 공산당활동을 해온 기간을 숨기기위해 가짜 이력을 밝힌것이라고도 한다.
이어 그는「블셰비키」의 상투적인 방법에 따라 당과 공청의 조직으로 상해 고려 공산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자신이 책임비서 자리에 앉았다.
이들은 규약에 따라 회원의 자격을 30세 이하의 청년으로 하고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모임을 가지면서 도서실에 「사회주의 연구소」란 위장간판을 내걸고 공청활동을 벌였다.
이때의 중앙위원은 박헌영 김태연 임원근이었고 집행위원의 임기는 3개월로 되어 있었다.
반세기에 걸쳐 한반도에 혼란의 불씨만 일으켰던 박헌영은 그의 선동수법을 멀리 상해의 뒷골목에서 터득한 모양이다.< 계속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