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2)추종의 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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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처음 박헌영의 노선을 따르고 그를 추종하게 된 것은1936년 일본 「와세다」(조도전 대학)의 제1고등학원에 입학하고서부터였다. 입학시험은 당시 한국 안의 각 고보를 졸업한 학생들 4백여 명이 모여 응시했었으나 정작 17명만이 합격되었다. 학교에 들어가서 보니1년 위로는 박인석(고인·전 부산대 교수)이 있었고 2년 윗반에는 최문환(전 서울대총장)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신입생 17명 가운데는 지금 알만한 사람으로 김두희(서울대문리대교수)와 하태(대한유조선사장)가 있었다. 그 중에도 나는 하태와 함께 김덕연 이라는 학생과 가장 친했다. 김은 동래 고보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지금 고려대)를 나온 학생으로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위였다. 넓은 이마에 짙은 눈썹을 한 그는 이지적이며 귀공자 같은 「타입」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가 도평의원 즉 친일파의 아들이라고 해서 가볍게 대했으나 차차 교제해보니 사람이 신중하고 천식이 넓어 이내 친해졌다.
그 당시 「러시아」10월 혁명의 기념일인 11월7일이 가까워 오면 형사들이 한국유학생의 하숙방을 일일이 방문하며 등대조사를 하는 것이 관례이었다고 나는 그때 이미 유학생회위원을 하고있었기 때문에 형사들이 내 집에 찾아오리라 예측하고 꺼림칙한 책들은 검은 책보에 짜서 쓰레기통에 갖다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늦게 한 형사가 찾아봤으나 짐짓 과일과 차를 대접하며 흔연히 돌려보냈다. 이 얘기를 다음날 김덕연에게 했더니 『박형은 나보다 수완이상 수로군』하고 말해 우리는 크게 웃었다.
그 후에 김과 나는 그 당시 일본사회 대중 당 당수「아베·이소오」(안부기웅)를 그의 자택인「에도가와」(강호천)「아파트」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우리가 현관에 들어서 「노크」하자 「아베」씨의 부인이 되는 노부인이 나왔다. 고결한 학자 「타입」의「아베」씨는 식모도 없이 늙은 처남과 셋이서 살고있었다.
그는 우리를 맞아 독일사회민주당얘기를 들러주었는데 대화도중 나는 불쑥『선생님은 사회대중당수로서 조선문제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나의 이 물음에 곁에 있던 김덕연이 깜짝 놀라는 듯했다. 「아베」씨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참만에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찬성하오. 나는 민족 자결론 자요. 당신들과 같은 유능한 청년들이 조선독립을 이룩해주시오』라고 격려해주었다.
이어 내가 『선생님은 전에 조도전대학 교수로 계셨는데 조선유학생으로는 누가 제일 우수하였다고 기억하십니까』고 물었다. 그는『장덕수 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대단히 우수한 학생이라고 보았네』라고 대답했다. 「아베」씨 집을 나오자 좀 채 술을 안 사는 김덕연이 나에게 맥주를 한잔 사겠다고 자청했다.
그는「비어·홀」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보성전문학교에 다닐 때 배운 최용달 교수(해방 후 북조선 인민 위 사법국장)의 얘기를 꺼내더니 드디어 박헌영의 활동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당시의 조선공산당의 비밀조직에 깊이 관계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나는 그때 박헌영의 고향이 충남 군산군 신장면 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됐다. 아마 내가 박헌영을 직접 추종하게 됐던 것은 김덕연 때문이리라. 나는 그 날 김덕연이 조직에 가담하라는 제의에는 똑바른 언급을 회피했으나 박헌영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나는 그때 독립투쟁을 계속 하면 어디선가 반드시 박헌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나는 그때부터 김덕연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 다음해 조선유학생동창회위원장 선거 때였다. 전임위원장인 박인석은 나와 동향의 진주출신으로 특별히 친했기 때문에 입후보할 것을 나에게 강권했으나 나는 김덕연에게 양보해 그를 무경쟁으로 무난히 당선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유학생동창회위원장직을 이용, 당시 조도전대학 제2고등학원의 송군찬(해방직후 북한민육기관지 편집위원장) ,동전문부 김응빈(제주출신 남로당 원·1955년 8월 박헌영의 반란음모사건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숙청)을 포섭, 비밀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1938년 여름방학 때 나는 나의 「아파트」의 방을 비밀 「아지트」로 쓰도록 빌려주고 귀국하였더니 그는 내방에서 체포되었다.
다음해 그는 지금의 서울을지로5가에서 서울 「콩·클럽」(박헌영의 지하조직)의 실질적 조직 자이었고 박이 제일 아끼던 김삼룡의 가두연락망을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해버려 김삼룡을 체포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경찰고문에 입은 심한 상처와 김삼룡을 잡히게 한 자실에 못 이겨 40년 명륜동의 서울여의도병원(현 고대부속 우석 병원)입원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다시피 하여 죽었다. 내가 만일그때 김덕연의 조직에 끼어 들었다면 일제에 맞아죽었든지, 나중에 남로당에서도 박헌영의 직계로 낙인찍혀 일찌감치 숙청을 당하든지 간에 많은 파란곡절을 겪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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