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37)분열의 상잔 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47년 9월21일은 서청 사상 가슴아픈 비극의 날이었다.
이날 서청은 두 조각이 나 선우기성 위원장을 비롯한 함북청 세력 등 초기 서청의 주축들이 대거 이청천 장군(광복호 총사령관)의 대동청년단산하에 들어가고 나를 중심 한 일부세력은 잔류하게 된다.
소매를 떨치고 갈라선 사실자체가 비극인데 서청 존폐에 따른 의견대립으로 어제까지 사선을 함께 넘던 합류 파와 잔류 파간에 유혈의 상잔 극까지 빚어 분열은 더욱 가슴아픈 것이었다.
대동청은 그 해 4월21일 귀국한 이 장군이 광복청(대표 오광선), 전국청년총련맹(대표 전진한), 건고(대표 오정방), 신생청(대표 현권)등을 주축으로 당시의 청년단체를 한데 뭉쳐 만든 연합체.
선우 동지 등이 서청을 버리고 이 대동청에 들어간 것은 대부분의 청년단이 통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마당에 서청만이 유독 지방색을 띠면서까지 남아있을 수 없다는 명분론 때문이었다.
또한 이승만 박사가 당초 이 장군의 청년단체 통합움직임에 대해 『대동단결의 내 주장과 같다』는 성명을 내고 총재직을 수탁하는 등 적극적인 후원을 한 것이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유는 표면적인 것이고 선우 동지가 우리와 헤어진 실제의 동기는 내가 부위원장으로 들어앉은 뒤 서청의 주도권을 동남 측이 장악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다가 세력분포도 8대2로 열세에 놓였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선우 동지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위원장으로 업으려했던 장창원 조직부장, 반성환 노남도 지부위원장 등 함북세력이 다시 반전, 선우 동지를 따라 대동청에 돌어간 것은 이성주(신포) 김윤근(함흥) 한면홍(함흥)등 그들의 선배들이 대동청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달리 나를 비롯한 잔류세력이 끝내 대동협의 합류를 반대한 것은 대동청에 들어가면 서청의 특수성을 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의 잘못된 일에 대해 뒷 수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서청을 남아서 지키게된 결정적 계기는 역시 이박사의 태도변경이었다. 당초 대동청 결성을 지원하던 이 박사는 어느 날 내가 찾아뵙고 진로에 대해 최종의견을 여쭙자 『글쎄, 통합이 잘될까. 자네의견대로 안 가는 것이 좋겠네』라며 돌연 태도를 바꾸었던 것. 안 그래도 서청의 간판을 내리기 싫었던 우리는 이 이박사의 말씀에 힘입어 잔류를 결심하게 됐고 이박사의 당초 말씀대로 움직였던 선우 동지 등은 끝내 다리를 못 뽑고 대동청에 간 것이다.
어쨌든 대동청에 간 선우 동지는 이청천 단장의 비 서장으로 활약하게 됐고, 우리들은 서청을 재건, 반 좌 운동을 계속하게됐다.
한편 대동청 합류문제는 감정대립으로 발전, 합류 파와 잔류 파끼리 서로 적이 되어 습격을 교환하는 등 낮 뜨거운 분열파동을 몰아왔다.
분열파동은 대동청 조직작업이 본격화된 그 해 6월부터 정식 발족된 9월까지 근3개월 동안 계속됐다.
중앙총본부는 광화문회관에서 밤을 새워가며 입씨름을 벌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원들을 자기편으로 회유하기 위해 향응 공세도 서슴지 않았으며 급기야 서로 피를 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중 대표적인 상잔 극이 잔류 파에 의한 남선 파견대 대표임일 동지「데러」와 합류 파의 총본부회관 습격이었다. 임일 동지「테러」는 분열직전 나를 따르게된 진룡 동지 회 대원들에 의해 감행됐다.
임일 동지는 당초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잔류를 주장했으나 도중에 『청년단은 대동단결 해야 된다』는 김구 선생의 뜻을 좇아 합류 파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우리 측에게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던 것이다.
임일 동지에게「테러」를 놓은 장본인은 진룡 동지 회 부위원장 김상호(작고), 훈련부장 박태호(현 미성「핸드백」영업부장)등이었다.
임일 동지는 그 날 선우 동지 등과 관철동「라모나·바」옆 악일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다가 진룡 측 정용철 대원의 눈에 띄었다. 이것이 비극의 실마리였다.
정용철로부터 『배신자임일 이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은 김상호 등 동지들은 그 길로 30여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악일 식당을 기습, 박 동지를 납치해와 무서운「린치」를 가했다.
나중에 임동지가 기절하자 진룡 측은 죽은 줄 알고 마대에 싸서「택시」편으로 한강에 수장시키려고까지 했다.
임동지가 살아난 것은「택시」가 수도청(현 시대백화점)앞을 지날 때 천행으로 정신이 깨나 탈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임동지가 마대에서 목을 쑥 뽑고 『사람 살려!』라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물건인 줄만 알았던 운전사가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고 그 틈에 임동지가 김·박 두 동지를 치면서 길바닥에 굴렀던 것.
이 소동으로 김·박 두 동지는 재판에 넘어가 1년 징역에 3년 집유의 선고를 받았다.
합류 파에 의한 서청 회관 습격은 대동청 결성을 마친 그날 하오에 있었다.
습격의 동기는 잔류 파로 말미암아 대동책에 대한 합류 파의 체면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날 합류 파의 심휘섭(서부지부장), 장창원 부장 등이 인솔하는 호림장정에 2백여 명은 「트럭」2대에 분송, 회관에 들이닥쳐 기물을 모조리 부수고 사무실을 지키던 대동강동지회(회장 홍성준)대원 1백여 명의 피를 흘리게 했다.
두 가지 사건 모두 상상도 할 수 없는 참극이 아닐 수 없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