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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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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방전 절정에>
「리더쉽」재편등으로 어수선했던 그해 (47년) 여름 일선조직애선 죽음의 공방전이 절정에이르고 있었다.
대전파견대총본부의 코밑인 유성온천장 (김갑순소유)에서 임일대표를 경호하던 유성지부 (지부장 김청정) 소속 이창복 대원(17· ?원)이 농민조합총련맹등 좌익측의 축창을 받아 측사 (6월중순)하는가하면 연달아 옥천에선 이북진상보고대회를 꾸미던 2명의 대원 (성명미상)이 역시 죽창에 찔려 희생됐다.
비슷한 때 목포 (지부장 김천룡)에선 부두노조를 조직하던 대원 1명 (성명미상)이 타살됐고, 이어 열린 목포극장에서의 계몽강연도 조선민주청년동맹의 습격을 받아 수명의 시민이 부상했다.
논산군에서도 참극은 벌어져 좌익학생의 소굴인 강경상고 (당시 학생회장 김동순) 앞길을 지나던 강경파견대 (대표 김주곤) 소속 대원 l명이 창돌에 뒤통수를 찍혀 즉사 (7월초)했고, 성동면에선 강연회 (연사임일)도중 접전이 벌어져 쌍방 2명씩의 희생자들 냈다. 강경사건 직후).
같은때 광주에선 전남방직에 경비원으로 배치됐던 대원 l명(성명미상·평안도)이 시냇가 모래밭에서 생매장된 시체로 발견되는등 끔찍한 일이 불거졌고 박헌영과 이오국 (남노당선2전부장)의 고향인 양산에선 합숙소가 피습. 식모등 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8윌).
이어 9월초엔 전주사무실에서 완주합숙소로 돌아가던 4명의 대원이 완주들머리 대로에서 30여명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임모동지(이름미상· 평북)가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살상극은 남선파견대 관할충남북, 전남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5월과 6월 경북파견대 (대표 선우경직)와 경남파견대 (대표 반성환)가 각각 대인와 부산에 뛰어듦으로써 참극은 남선전체로 확산되고 있었다.
계몽강연차 대구 칠성동다리를 건너던 8명의 대원이 공주 금강교사건때처럼 다리 한중간에 갇혀 죽창세례를 받던끝에 1명 (성명미상· 함경도)이 측사하고 한모동지 (이름미상· 평안도)등 나머지 전원이 중상을 입었다. 한동지는 이날의 부상으로 끝내 한쪽다리를 잘라내어야 했다 (6월초).
또한 9월초 전국청년총련맹 김천지부장 오형수씨의 요청으로 그곳에 갔던 50여명의 대원은 김씨의 정미소에서 자다가 방학 및 도끼공세를 받아 l명이 죽고 3명이 실종됐다 (모두 성명미상).
대구에 이어 내려간 경남파견대는 8월초 방어진·삼낭진·번양·마산·진주·통영·김해등에 지부를 조직하자마자 일제기습을 받아 방어진과 밀양에서 각각 1명씩의 희생자 (모두 성명미상)를 내야했다.
그러나 이같은 희생은 약과였다.
그해 가을 서산에서 지부조직차 고북면으로 이동하던 60여명의 대원들이 산 모퉁이에서 기습을 받아 몇명만 살아나오고 50여명이 몰살을 당한 어마어마한 참사까지 일어났다. 이들은 「버스」 l대를 전세내어 가던중 승객으로 가장, 손을 드는 좌익「게릴라」 3명에게 속아 차를 멈췄다가 매복해있던 수백명의 좌익들에 포위되어 참변을 당했다. 대부분 도끼에 찍혀 죽었으며 부상자는 그들이 차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앉은채로 타죽었다.
또 전남모지방에선 임일대표등 32명이 계몽강연차 수수밭을 지나가다가 길목에 숨어 있던 수백명의 좌익들로부터 역시 도끼공격을 받아 뒤에 처져 변을보던 임일대표와 「보디·가드」등 2명만 천명으로 목숨을 건지고 나머지 30명은 고스란히 떼죽음을 당했다. 6· 7· 8, 9불과 4개월동안 이같이 희생된 숫자는 모두 90여명. 상반기 피해 10여명과 합치면 남선일대의 총희생자는 벌써 l백명을 돌파하고 있었다.
한편 서청의 보복은 상반기 접전에서도 그랬지만 당한 것이 문제가 안될만큼 매서운 것이었다. 적어도 2, 3배를 갚은 뒤라야 손을 벌고 일어섰다.
일일이 예거할 것도 없이 피해 가난 지역에선 우익단체의 「코치」를 받아 좌익집을 돌아가며 도끼로 공격, 쑥밭을 만들었다.
거기엔 피가 피를 부르는 행동만이 있었다.
특히 부산에선 부위원장 엄정일 동지(작고·준진)와 허원? 동지 (준진)가 당시 좌익옹호 검사로 알려진 정작복씨 (사상담당)를 백주에 검찰청앞 골목에서 사살(9월초)했고 엄 동지는 이어서 평양에 갔던 이춘직 동지를 지휘, 민전의장 박모 (대선양조사장)를 자택에 침입해서 사살하기까지 했다.
이밖에 남선파견대는 강경장고를 기술적으로 요리, 50여 좌익학생들을 반죽음이 되게 두들겼다. 동상「테러」 또한 조금도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진행, 대구파견대는 좌익계 민성일보 (구도청옆)를 (6월초) ,부산파견대는 대중신문· 부산신문· 부산일보· 민중일보를 한날한시에 기습, 활자판을 뒤엎고 윤전기 및 활판에 모래를 뿌렸다 (7월초).
부산파견대는 이어 손전선전부장 (영천·현신한기업대표)이 주동이 되어 만담가 신부출· 배우 문?봉등이 공연을한 부산극장무대에 「다이너마이트」를 투척 (7월말)하고 민전· 해운동맹· 조선민주애국서년동맹· 남로당을 기습, 건물을 탈취하기도 했다. 모두 결판을 기약하는 서청의 「올· 코트· 프레싱」이 부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아무튼 그해여름 남조일대는 벌집 쑤신듯 살인이 횡행했으며 거리는 피로 얼룩졌다. 이하주요사건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계속>
◇고침= 본난 (33)회째 사진중 김윤기씨는 전교통부장관을 지낸 분으로 이는 당시 축구협회장을 지낸분과 동명이인으로 잘못게재 됐기에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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