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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의 시대공감] ‘킹 핀’ 쓰러뜨리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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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31면

볼링에서 한 번에 열 개의 핀을 다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맨 앞에 보이는 1번 핀이 아니라 1번과 3번 핀 사이에 숨은 5번 핀을 겨냥해야 한다. 이른바 ‘킹 핀(king pin)’이다. 원래 킹 핀은 밀림에서 벌목한 나무를 강물에 띄워 수송할 때 나무들이 서로 엉킬 경우 건드려주면 다시 움직이게 하는 나무 한두 개를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한다.

혹시 우리 사회가 뗏목이 뒤엉키는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2007년 1인당 소득 2만 달러의 고지(高地)를 넘고 나선 아직도 2만 달러 중반에 머물러 있다. 우리나라보다 앞선 국가들이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진입하는 데 평균 8년이 걸린 일이다. 양극화, 잠재성장률 하락, 시장과 산업의 이중구조화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반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해의 조정이 아니라 대립으로 치닫는 정치권의 작동 구조에 국민의 실망은 커지고 사회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능력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다. 그래서 우리가 건드려야 할 ‘킹 핀’은 무엇일까 고민해본다. 근본문제를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정책적 대응이나 대외 여건의 호전으로 난제가 일시적으로 풀릴 수는 있지만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위기가 온다는 것을 그동안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으로 꼽아 보든 킹 핀 후보엔 우리 사회의 ‘게임의 룰’ 문제를 빼놓을 수는 없다. 사회의 인센티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일단 진입을 하면 초과이윤이 생기는 시장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독과점 시장, 공공 부문, 사회적 지대(rent)를 누리는 특정 직역(職域)사회 등이다. 이런 ‘엘리트 카르텔’의 벽을 낮춰야 한다. 공무원시험이나 공기업 입사시험 한번 합격으로 평생에 걸친 ‘철밥통’을 얻거나 공정경쟁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는 일부 시장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경쟁의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런 시장의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고 안정적이어서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여기부터 개혁해야 진입장벽을 넘지 못해 과도한 경쟁에 노출되는 부문에 숨통을 터줄 수 있다. 자영업자, 비정규직, 하청 중소기업, 취업 준비 세대 등이다. 승자가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가고 한번 이긴 사람이 계속 이기는 구조가 바뀌어야 패자부활전이나 ‘다음 기회’도 주어질 것이다. 시장의 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쟁에 뒤처진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일자리와 사회안전망 확충, 재정의 소득분배기능 강화 같은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또 다른 킹 핀 후보의 하나인 ‘사회적 이동(social mobility)’도 게임의 룰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사회적 신분이나 빈곤이 고착화되거나 대물림되는 사회, 아무리 노력해도 넘지 못하는 벽이 있는 사회는 효율과 역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끈이나 연줄과 같이 사회적 이동을 저해하는 요소를 없애고 교육·노동시장 등에서 계층 간 이동을 원활히 하는 ‘사다리’를 여럿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면 된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퍼져나가야 한다.

문제는 킹 핀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만 쓰러뜨리는 것은 더 어렵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기득권을 허물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성과를 낼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정부가 경제활성화와 일자리를 중심으로 한 국정과제를 추진하면서 신뢰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본의 축적에 역점을 두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관행으로 굳어진 ‘비정상’들을 정상화하겠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눈에 보이는 문제만 풀려 해서는 안 된다. 앞에 보이는 1번 핀을 겨냥하면 맨 뒷줄 양끝의 7번과 10번 핀은 잘 쓰러지지 않는다. 그렇게 남은 ‘스페어’ 핀 처리는 더 어려운 법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이 더 처리하기 힘든 그런 ‘스페어’ 핀들의 집합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앞에 보이는 1번 핀을 겨냥했던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적인 문제를 찾는 실력과 그런 킹 핀에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지도층의 역할이 중요하다. 입으로는 말하고 머리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해서는 안 된다. 더 누리는 사람들의 책임 있는 모습이 킹 핀 쓰러뜨리기의 시작이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과 예산실장,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을 지냈다. 상고 졸업 후 은행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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