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과와 평정사업|「따이한」의 용맹 심고…주월 한국군 8년만에 회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사이공=신상갑 특파원】한국역사상 첫 해외원정군인 주월 한국군이 파월 8년만에 드디어 개선 귀국한다.
자유세계의 대공전선의 일역을 맡고 우방국가인 월남을 공산주의침략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주월 군은 그 동안 일대의 밀림에서 피 어린 자유수호 투쟁을 해왔으며 월남에 평화가 도래함으로써 전진을 털고 귀국하게 된 것이다.
64년 9월 비 전투부대인 제1이동외과병원의 파월을 계기로 대월 군사지원에 나선 한국은 65년 9월25일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월남 수도「사이공」에 창설했었다. 65년 3월16일의 건설지원 단인 비둘기부대의 파월, 65년 10월9일의 청룡부대 파월, 65년 10월 하순의 맹호부대 상륙, 66년 3월15일의 백구부대 창설, 66년 6월1일의 십자성부대 설립, 66년 9월 하순의 백마부대 증파, 67년 7월1일의 공군지원 단 창설로 주월 군 총 병력은 4만8천명에 이르렀었다.

<주월 총 병력 4만8천>
그러나 월남정세의 호전에 따라 한-월 두 나라 정부간의 협의 하에 71년 12월부터 72년 4월에 걸쳐 청룡부대를 주력으로 한 약 1만명의 병력이 주월 군 제1단계 철수를 끝마쳤다. 따라서 이번에 귀국하는 병력 수는 약 3만8천명에 이른다. 철수작업의 총지휘는 69년 5윌1일 주월 군 제2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이세호 중장이 맡고 있다. 주월 군이 담당했던 전술책임지역은 월남의 중부동해안 지방으로서 정치·군사·경제면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을 따라 평균 50km 폭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역이며 백마부대의 최남단에서 맹호부대 최북단까지의 거리는 3백71km로서 서울∼부산간의 4백20km보다 약간 적은 거리이며 백마부대 1개 사단이 담당한 지역의 거리만 해도 한국휴전선과 버금하는 2백50km에 달한다.
한국군 전술책임지역 안에는 남북으로 뻗은 1번 도로와 동서로 뻗어「크메르」국경에 이르는 19번 도로 및 21번 도로가 있다.

<4백 70만명 대민 진료>
한국군은 8년 동안 대부대작전 1,170회, 소부대작전 566,560회를 실시하여 적 사살 41,370명, 공용화기 1,658문과. 소화기 19,263정을 노획하는 전파를 세웠으며 대민 사업을 활발히 벌여 가옥 1,744동, 교실 357개, 교량 132개, 도로 393.8km, 공공시설 1,210동을 건설하고 318,403회의 친선활동을 했으며 4백 70만명의 월남인들에게 대민 진료를 실시했다.
6,800평방km의 면적을 전술책임지역으로 맡은 한국군은 오작교작전, 홍길동 작전,「차빈동」전투에서 우수한 전투력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독수리 70∼1호 작전, 구정선제공격작전, 「안케·패스」작전, 성마 72∼1호 작전에서 적의 주력을 분쇄했다.
72년 3월31일에 개시된 월맹군 대공세의 불꽃이 4월11일 새벽 한국군 전술책임지역인 「안케·패스」에 비화되었을 때 월맹군 최 정예부대인 제3사단 제12연대를 격멸, 중부월남의 생명선인 19번 공로를 차단 된지 l6일 만인 4월26일 다시 개통하여 파월 사상 최대격전을 치른 것은 특기할만하다.
7월 1일부터 11월1일까지의 4개월 동안 한국군은 월남군의 실지회복작전을 간접지원하기 위해「안케·패스」에서「망양·패스」에 이르는 40km의 19번 도로 경계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 동안 한국군은 약 1만2천8백명으로 추산되는 공산군과 맞서 왔던 것이다. 한국군의 전술적 특징은 연대규모의 적의 공세에도 48시간 견딜 수 있으며 적의 120mm 박격포 사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구축된 중대전술기지운영에 의한 선제작전으로 요약된다.
66년 8월9일「크레르」국경「플레이쿠」성의「두코」에서 맹호부대 기갑부대 제9중대는 야간경계 중 월맹정규군 제88연대 5대대병력의 야간기습을 격퇴했으며 67년 2월14일「차빈동」에 위치한 청룡 제3대대 제11중대는 월맹 정규군 2대 연대의 기습을 격퇴하여 중대전술기지운용의 탁월성을 전세계에 알렸다.

<양민보호 최우선으로>
공산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와 공산포로의 진술은 한국군이 그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가를 입증해 주었다.
한국군은 8년간 빛나는 전과를 냈지만 피해도 없지 않았다.
전사 3천7백77명, 전상 8천3백41명의 피해를 낸 것은 한편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월남전이「게릴라」전이란 특수성에 비추어 한국군은 1백명의「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우선 보호한다는 방침아래 한국군 특유의 민사심리전을 전개하여 한국의 얼을 월남 땅에 심기에 노력했다. 주월 군은 싸우면서 자유월남인을 도와 십자군의 「이미지」를 심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친선활동·구호활동·대민 공사·대민 진료·태권도 보급 등을 통해 20년 전화에 시달린 자유월남인에게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평정사업은 결실을 맺어 파월 초기 30%에 불과했던 전술책임지역 안 평 정도는 72년 3월에는 96.1%에까지 달했다.

<실전경험 국방의 기틀>
66년 3월 건설지원 단인 비둘기부대가 파월 되면서 편 건설사업은 주월 군 작전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 복구한 것을 비롯, 가옥 1천7백44채·교실 3백57개·도로 3백93.8km·공공시설 1천 2백 10동을 건설했고 4백 70만 명의 월남인을 무료진료 했다.
또 친선활동은 각종 행사를 총 31만8천여 회나 벌여 4백여만명의 월남인에게 친한 감정을 불어넣었고 구호활동은 피난민수용소의 생활환경개선을 비롯, 쌀 1만5천9백여t·밀가루 1천6t등을 들여 월남인의 자조사업을 도왔다.
파월 8년만에 개선하는 주월 군은 총 2만5천7백14개의 태극·을지 등 무공훈장과 9천9백 51개의 외국훈장을 받아 그 무공을 전사에 자랑하고 있다.
한국군은 우방월남을 지원하는 일방 국내의 전투력 증강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파 월로 얻은 것을 보면 ①실전경험의 체득=6·25동란의 포성이 멈춘지 24년, 당시의 전투경험자가 거의 군을 떠났고 6·25동란 중에 태어난 새 세대가 국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월남 전선에서의 실전경험은 자주국방에 기여하는 도가 크다. 연 파월 병력은 국군 60만대군의 반수에 이르는 30만명을 돌파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