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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제30화>서북청년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대학원투쟁>
동명여중(교장 이신단·행방불명)과 한성중(교장 박준영·월북)은 중학교라고 우습게 보았다가는 큰코 다칠 좌익의 온상이었다.
둘다 좌익 교장이버티고 앉아 자파로 교사진을 짜고는 어린학생들을 조종, 기성세대 뺨치는 지하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동명은 이사장 이응삼(월북)마저 좌익이어서 현교장 이운정씨(당시교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사들이 적색.
그들은 교사 김숙수를 「리더」로 김일성초상을 그려 여학생들로 하여금 시가지에 내다붙이게하는 한편 각종 「비라」도인쇄, 학교·회사등 큼직큼직한기관에 뿌리도록 했다.
한성도 마찬가지였다. 상급생들을 조종, 걸핏하면 운동장에서 찬탁궐기대회를 벌이게하고 심한 날은 「스크럼」을 짜 아현동「로터리」로 내보내기도 했다. 교사들이 대거 경찰에 잡혀가면 상급생을 하급생반에 들여보내 대신 시간을 메우도록 해가면서 좌익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같은 2개학교에 서청의 행동대가 진주하게된것은 좌익교사들의 「리스트」를 빼온 내부의밀고가 결정적인 계기가됐다.
밀고자는 양쪽 다 우익교사(동명은40대·한성은35세가량)들로 4월초순(47년)에 각각 김계용학생부장을 찾아와 진상을 털어놓았다.
「리스트」에의하면 동명좌익은19명, 한성은 7명(전체교사 30명)이었다.
당시 서청은 피를 보는「테러」엔 진절머리가 나있던 터. 중학교 정도를 다스리는데 굳이 무차별 「테러」까지 동원할것은 없었다.
김부장을 비롯한 임차장·강준복동지(함북길주)등은 1백30명 내지 1백50명의 행동대를 몽둥이로 무장시켜 두학교에 차례로 진주, 3∼4일씩 주변을 지키면서 이들 좌익교사들의 출근을 실력으로막았다.
그때는 좌익이 아닌 사람(청년층)이라도 「서북」완장을 두른 우리 대원을 만나면 슬금슬금 피해 다닐정도로 서청의위세가 하늘을 찌를때 김부장등의 학원진주 작전은 1백% 효과를내어 좌익교사들은 서청이 철수한 뒤에도 잊어버릴때까지 얼씬거리지 못했다.
한편 이같은 서청학생부의 활동이 있기전에도 많은 서북출신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 민주학원의 제단에 젊은 피를 뿌렸다. 처음(46년가을)대학에 뛰어든 동지들은 ▲서울공대=김원길·조봉관 ▲법대=마하영 ▲상대=이군철(현 고대교수) 김재순(공화당당무위원) 박청산등 11명 ▲음대=김낙호(현 서울음대교수) ▲문리대=계동제 ▲연양대신학과=김득신등 50여명이었다.
대부분 우리의 평안청년회와 계동제씨의 서북학생총연맹의 조직들이었다.
이중 서청조직의 집단입학은 경무부수사국장 최능진씨와 백남홍위원장간의 뒷거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대학(특히 서울대)형편은 누차 말한대로 좌익측의 서슬이 시퍼럴 때. 치안책임자의 한사람이었던 최씨는 하루속히 「힘의 불균형」을 뒤집기위해 이념과 사상이 투철하고 박력있는 서북학생들의 행동력을 필요로 했고 백위원장은 거꾸로 많은 대원들을 대학에 보낼수있는 구멍을 찾고있었다.
목적은 다소 틀렸으나 입학만은 공통점이 아닐수 없는것. 그래서 최국장의 제의에 의해 행동력과 입학자격을 맞바꾼 것이 곧 무더기 진학이있다.
물론 시험을 안보는 「프리·패스」. 공대만 김동일학장(평남강서·이학박사)이 『아무리 그래로 수학이 백지여서는 곤란하다』고 해서 형식상 그 시험을 치렀을뿐 나머지 다른단대(서울대)는 대부분 무시험 진학이었다.
무더기 입학은 최국장, 백위원장, 당시의 서울대본부 학생처장(공대는 오진상학생과장)등 세사람만이 알고 비밀리에 처리됐다.
아뭏든 대학에 뛰어든 서북학생들은 공부릍 하면서 싸우는 학원의 안전판으로서 유감없는 활익을 했다.
「비라」에는 「비라」로, 「테러」에는 「테러」로 대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좌익조직을 캐내는 경찰의 정보원노릇도 했다. 서울대의 경위는 그때도 동대문경찰서(서장 최모)와 협조가 됐다.
서청이 된뒤의 일이지만 『순교자』의 저자 김은국씨(황주)도 서울대에 박힌 서청의 전위조직이었다.
김씨는 46년에 단신 월남, 각 합숙소를 전전하던끝에 이듬해봄 선우경식동지(평북정주)를 따라 목포지부에 내려가 정식대원이 됐다. 김씨는 학생부장직을 맡아보며 지부에서 대주는 돈으로 목포고를 나왔으며 서울대에 들어가서는 서청의 기치를 높이들고 반좌전선에 앞장섰었다.
그는 6·25때 서울에남아있으면서 정보·연락·「비라」및「포스터」작전등 「빨치산」투쟁까지 했었다.
우리는 그가 우리 서청조직인줄 전연 몰랐으나 연전에 귀국, 숙부 김형근씨와 함께 한자리에서 스스로 털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알게됐다.
이들 서청학생들이 맨주먹으로 학원투쟁을 벌일무렵 많은월남 실업인들이 학비를 보조하는등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신신백학점뒤에서 일광여관을 가지고 있던 최성모씨(황해도·동아제분회장)는 수십명의 학생들을 무료 기숙시키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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