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인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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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월남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이 지상은 잠시나마 정적을 찾게 되었다. 실로 역사적인 정적이랄 수도 있다. 인류는 이제 저마다 숨을 죽이고 그 정적을 지켜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순간이다. 폭음 속에 밀려났던 인간의 음성이 비로소 따뜻한 여운으로 들릴 수도 있는 순간이다. 인류는 이 초조한 고요함을 어떻게 흐뭇한 고요함으로 오래 지켜갈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월남의 총성은 이제 겨우 멈추었을 뿐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우울했던 노력들이 다만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밖에도 이 지상엔 아직도 숨막히는 대치와 조준을 풀지 않고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있다.「라오스」의 산간에선 월남전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이 계속되고 있다.「타일랜드」의 북부는「게릴라」들에 의해 마비된 상태이다. 「크메르」정세도 위기일보전이다. 중동의 사막에선 살육의 기회를 노리는 눈초리들이 무섭다.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선「모잠비크」를 비롯한 민족해방운동이 점점 혈기를 더해간다. 대국들은 약소국의 약점을 언제나 입 속에 물고 있다. 결국 전화의 불안은 이 순간 잠시 멈추거나 잠적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영구히 사라지지도 않았으며, 또 그런 조건은 어느 구석에도 마련되지 않았다.
세계의 최강국을 대표하는 미국의「닉슨」이 이런 상황 속에서「협상의 시대』를 외치며 정치적 좌절을 딛고 일어선 것은 퍽「아이러니컬」하다. 그는「강자의 승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강자의 억제」를 부르짖었다. 73년 그는 대통령취임사에서도 오늘의 상황을 『상호억제의 시대』로 표현했다.
그가 68년 대통령선거에 나설 수 있었던 계기는 월남전이었다. 만일 그 전쟁이 격화되지 않았던들, 그는 오늘의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72년의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월남전의 평화적 해결을 대통령 당선의 유일무이한「테제」로 제시했다. 그것을 유감없이 종횡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치적인 역량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이 정치적 조사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끝내 인내와 노력으로 적어도 미국엔 욕스럽지 않은 월남휴전을 달성했다. 한 정치인으로서 그는 약속을 성실하고 책임 있게 지킨 셈이다. 「닉슨」자신의 말 마 따나『정신적으로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미국인』에게 그는『최후의 인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세계엔 아직도 반목과 저주와 질시가 도처에 남아있다. 이 순간의 평화는 막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평화의 경쟁」은 아무 데서도 볼 수 없다. 마치 엷은 껍질의 계란이 지금 인류의 손바닥에 들려져있는 느낌이다. 그 평화의 구조를 어떻게 균형과 조화 속에서 쌓아갈지는 세계시민의 공동과제이다. 그 평화의 계란을 깨는 정치인이야말로 인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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