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평화협상|드디어 막 내린 그 흥정의 진폭|지루했던 일면 전쟁 일면 협상 5년의 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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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근 5년 동안 계속되어 온 월남전의 지루한 협상과정은 미-월남 측과 월맹-「베트콩」측이「사이공」에 서로 유리한 정부를 수립하려는 목표를 뚜렷이 보이면서도 군사적 우열을 결정적으로 반영하지 못 했다.
초기의 미국 측 대량공세와 이에 맞선 공산 측「게릴라」전이 어느 쪽에도 유리한 고지를 허용하지 않게 되자 공산 측은 68년 구정공세로 우세를 노렸으나 이 기도가 실패-오랜 지구전 끝에 72년 초 춘계공세를 실시했고 미국은 월맹 해안봉쇄 및 북폭 강화로 맞섰다. 이러한 상호간의「에스컬레이트」와 역「에스컬레이트」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군사적 우열은 쉽사리 가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협상의 결정적 계기를 가져온 것이「닉슨」의 대 중공-대 소련 외교였다.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데 실패한 미국은 이두 월맹 후견 국과의 실리외교로 월맹을 고립시킴으로써 진지한 휴전협상의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 무대가 마련됨으로써 월맹 측도 그들이 주장한 무제한 장기전의 현실성에 양의를 느끼게된 것이다. 일면전쟁 일면협상의 지루한 5년 협상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준비 기(68년 3월 31일∼69년 5월 13일)=68년 3월31일「존슨」미국대통령이 그의 재출마포기 태도표시와 함께 북 폭 중지명령을 내림으로써 회담개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쌍방은 예비회담 벽두부터 회담장소, 월남과「베트콩」의 참석문제,「테이블」형태 문제등 사소한 문제로 의견의 대립을 보여 회담이 난항을 면치 못할 것을 예고했다.

<4자 회담 진전 못 봐>
결국 미국·월맹·월남·「베트콩」이 참석하기로 한 4자 확대 평화 본 회담은 69년 1월 25일「닉슨」취임 후에 열렸다. 회담이 본격적인 의제를 놓고 토론하기 시작한 것은「베트콩」대표가 미군철수 및 연합군의의 무조건철수,「제네바」협정 준수, 연정수립, 자결원칙 등을 골자로 하는 10개항 평화 안을 정식제안(69년 5월8일)하고, 여기에 대해「닉슨」대통령이 월남에서의 상호철군, 국제감시하의 휴전, 월남에 대한 자결의지를 요지로 하는 8개항제안(69년 5월14일)을 함으로써 비롯됐다. 그러나 이 기간은 단순히 양측이 군사력으로는 약간의 우열은 보였을지언정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 대화의 창구를 열었다는 의의밖에 없다.
②탐색기(69년 6월8일∼72년 1월25일)=이른바「닉슨·독트린」과 월남전의 월남 화 계획이 발표되고 이어「미드웨이」함상의「닉슨」·「티우」회담에서 미군 2만 5천명의 철수계획이 처음으로 발표된 기간이다.
또한 월남 화 계획수행의 일환으로 70년 4월 미군의「크메르」진공과 71년 2월의「라오스」작전이 감행됐고, 그리고「키신저」의 비밀외교가 시작되었다.「닉슨」대통령은「파리」회담에 회의를 느끼고「키신저」를 시켜 비밀회담을 진행시켰으나 여전히 협상에서 우월한 입장을 얻기 위해 제한 확 전을 단행했다.
말하자면「닉슨」은 미군의 군사력으로 공산군의 전력을 약화시킨 다음 월남 화 계획을 성공시키고 회담을 통한 휴전을 이룩, 명예로운 철수를 하겠다는 복안을 가졌던 것이다.
71년 5월31일 비밀회담에서 미국은 처음으로『미군철수와 미군포로석방의 동시이행』을 제시했으나 월맹은 계속 미국의 일방적 전투행위 중지 및 일방적 철군을 주장하고「티우」 정권거부라는「원칙」으로 응수해왔다. 그후 미국은 평화 9개항,「베트콩] 은 7개 평화 안을 번갈아 내놓았으나 모두가 타협의 소지가 없는 양측의 기본원칙을 고수하는데 불과했다. 회담이 이같이 지지부진하고 미군의 화력전이 공산 측의 양보를 얻어내는데 실패하자「닉슨」은 미국 내 반전여론의 압력을 받게됐다.
이러한 「닉슨」의 고 경을 타개시키는데 탁월한 효과를 가져온 것이 북경방문발표(71. 7. 15)와 비밀협상내용 공개였다(72. 1. 25).
이 같은 조치로「닉슨」은 국내의 여론을「3극 평화의 도래」로 회전시켜 유권자, 정적, 세계여론 앞에 적잖이 강한 인기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받았으며「하노이」·「베트콩」의 불안과 대국 불신풍조를 고조시켰다.

<대국 외교업고 자신>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단계에서 양측은 여러 번 새로운 주장들을 내놓았으나「티우」제거, 친미정권부용을 고집하는 월맹과「티우」존속, 명예로운 철군을 내세우는 미국의 입장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었으며 상대방의「보자기」를 들여다보는 효과밖에 없었다.
③전환기(72년 3월 30일∼72년 8월29일)=대국간의 어깨너머 흥정에 반발하고 협상에서의 유리한 고지점령을 위한 월맹군의 춘계대공세가 시작되어,「닉슨」이 이해 12윌 1일까지 주월 미군 병력수준을 2만 7천으로 감축할 것을 발표, 사실상 철군의사를 명백히 한기간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월남전의 성격을 관찰하는 양측의 견해차이로 인해「파리」회담은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월남 화 계획의 실패로 월맹항만 기뢰 봉쇄, 월맹심장부의 강타라는 극단적인 도박을 벌여야만 했다.
월맹 또한 미군의 북 폭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먼저 미국에『북 폭을 중지하고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외쳤다. 그 결과「하노이」는 ①「티우」는 제거하되 ②「사이공」정권은 그대로 두고 반대세력 탄압만 중지하면 ③그 정권과의 연·정에 응하겠다는 선으로 약간 누그러졌다(5월초「레·둑·토」「파리」귀임 성명).
여기에 대해 5월8일「닉슨」이 ①월맹이 미군포로를 석방하고 ②국제 감시 하에 전「인도차이나」반도에서 휴전에 동의하면 ③미군은 군사행동을 전「인도차이나」반도에서 중지하겠다고 이른바 정치·군사분리 해결안을 발표함으로써 회담은 전기를 맞게됐다. 미국의 이 제안은 휴전이 되면 4개월 내에 미군이 철수할 것과 월맹의 월남 내 점령지역포기를 종용하지 않음으로써 처음으로 월남의 정치적 장래문제는 월남인간의 해결에 맡기자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비단 계속적인 월남지원은 약속했지만 이것은『미국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으로 해석되었다.
활발한 대국외교와 항만봉쇄를 업은 미국의 융통성과 전선에서의 유리를 업은 월맹의 자신이 이기간을 대등한 접촉으로 몰고 갔다.

<승자 없는 협상 타결>
④종결 기(72년 10월8일 현재)=월맹이 4년만에 처음으로「닉슨」의 5·8제안에 따른 군사문제와 정치문제의 분리토의에 동의한 것은 72년 10윌 8일이었다.
연정수립과「티우」제거 포기 선에서 공산 측이 양보하고 월남 내 월맹군의 철수문제 등에서 미국이 양보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 안에 대한「티우」의 반발이 예상외로 거세다는 것을 이유로 미국 측이 원칙적인 항의에 대한 조인을 미루자, 10월 23일「하노이」는 10월30일로 조인 예정된 9개항 정 휴전안을 공개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미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10월 26일)「키신저」는 대체로「하노이」의 주장에 수긍, 『평화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부풀기 시작한 타결 낙관론에도 불구하고「닉슨」이 12월 18일 다시「하노이」·「하이퐁」대규모 북 폭 명령을 내려 종반전에 접어든 협상이 또 한차례 난항을 한데는 9개항 평화 안의 최종결정을 둘러싼 상대방의 양보에 대한 계산착오가 첨예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제감시위원단의 규모확대 및 비무장지대 복원 등 월남주권유지에 대한 마지막 양보를 월맹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거센 국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북폭을 계속하는 한편 「파리」 비밀협상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전 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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