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충무 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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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남 충무시는 이름났던 옛 통영갓의 본고장. 4백년 전통의 세병관이 마주보이는 옛 병영터 충무시 문화동일대의 산비탈을 오르느라면 다닥다닥 들어붙은 판잣집에서 아직도 갓을 만드는 그때의 기공들이 부르는 노랫가락이 아련히 들려오는 둣 고풍이 스민다.
『한코 뜨라, 두코 뜨라. 뜨라뜨라….』
총모자와 양대를 한올한올 엮는 짜임새가 정교하고 질이 좋기로 이름난 통영갓-. 그래서 행세하던 옛 사람들은 이 통영갓을 쓰지 않고선 제대로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절묘한 기법의 전래자는 이제 총모자 제조공인 인간무형문화재 5호인 고재구옹(75·충무시문화동88)과 제립공인 김봉주옹(70·인간무형문화재지정 신청중· 충무시명정동102) 두 분만이 유일하게 그 대를 잇고있다.
그나마 지난 12일 인간무형문화재 4호 전덕기옹(충무시문화동120)이 노환으로 세장을 떠났기 때문.
그리고 가장 힘든 기법을 요하는 양대 제조공의 대는 이 충무에서도 끊긴지 벌써 오래이다.
예부터 갓은 양대(갓의 둘레)를 만드는 사람, 총모자(갓의 높이)를 만드는 사람, 그리고 이들을 합쳐 제립하는 사람으로 3분하였다고 한다,
고옹은 17세때부터 총모자 만드는 법을 배워 지금까지 58년동안 총모자만 짜 왔고 김옹은 51년간 제립만 해온 분들이다.
총모자는 품질 좋기로 이름난 제주도쪽 말의 꼬리로 만든 것이 제일. 41도 6백가닥지를 그 사이사이에 날로 4백20가닥지를 총총히 꼬여 넣어 한개를 만드는데 빨라도 10여일이 넘게 걸린다.
도구라야 형틀 1개와 씨날을 죄고 엮는데 쓰이는 골림대1개뿐. 10여일간을 두고 짜고 죄는 기공의 섬세한 솜씨에 따라 갓의 모양이 정해진다.
양대의 공정도 이와 꼭 마찬가지. 대(죽)를 실처럼 가늘게 다듬고 뽑아 날줄 3백가닥사이에 보통 씨줄 7O여가닥을 엮어 만든다. 예부터 대는 마디사이가 길고 연한 하동·고성것을 많이 사용했단다.
총모자와 양대 두가지가 만들어지면 이들을 마지막으로 조립하는 과정이 제립. 형틀·칼·윤두, 그리고 먹으로 물감을 들일 칠솔정도만 가지면 총모자와 양대는 거뜬히 갓 한개로 이뤄진다. 이것에 옻칠을 해 며칠간 햇볕에 말려 윤기를 내면 모든 일손은 끝나게된다.
갓1개의 값은 6천원. 주문이 있으면 한달에 3개정도 만드나 전혀 주문이 없는 달도있다.
갓의 유래는 우리네 선조들이 서로의 충돌을 막기위한 방편으로 토관을 썼다는 고사가 있어 그때부터 예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겨온 것 같지만 정확히는 삼국유사에서 신라38대 원성왕(약1천2백년전)때부터 쓴 것으로 기록돼있다.
통영갓은 임신왜란후인 1598년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용이 전승기념으로 세병관을 세워 12공방을 두고 그안에 입자방을 만들어 기공을 관급으로 양성, 갓을 생산하여 군·관·서민들이 쓰게한 데부터 널리 생산지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특히 국상이 있을때는 검은갓에 명베를 입힌 「통영백립」이 날개돋친듯 팔렸고 벼슬아치들은 양태가 큰 대립(폭1·5촌)을 쓰고 멋을 부렸으며 대원군도 이 통영대립을 쓰고 세도를 부렸다고 고옹은 말했다.
그러던것이 이조말 단발령이 내리면서부터 갓은 점차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고 밤새 『이 갓 만들어 나랏님께 진상하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갓을만드는 모습은 이젠 한갓 옛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고옹의 모습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글 원대연기자>

<사진김택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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