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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광개토대왕 비|이병훈 박사 특별 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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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가장 오래된 두 고비>
우리 나라에 관한 비석 가운데 지금 평남 용 강에 있는 낙랑시대의 점선(염 제) 현 신사 (본시 토착 시 회의 것) 비를 제외하고는 고구려 구도였던 지금의 통구동강에 흘립한 광개토왕비와 신라진흥대왕의 4개 순수비가 오래된 것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이 4개의 순수비가운데 북한산비는 이치여부 문제로 의논이 좀 분분하였고 근래에는 광개토왕비 문제로 일본 동경에서 한·일 학자간에 논쟁이 벌어져 우리 국내에서도 신문지면을 번거롭게 했다.
북한산비는 보관상 할 수 없이 1천4백여 년만에 그 자리를 뜨게되었지만 그 건 비의 연대문제에 관해서는 아직도 정설을 보지 못한 채로 돼있고 또 광개토왕비가운데 약간 부분이 일인의 조작한 자취가 있다고 하는 한편 모 신문지상에 김종무 교장의 정중한 논문이 발표된바 있으나 아직도 귀결은 짓지 못 하고 있다.
이 두 비문에 대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학술지상에 발표해보려는 의욕을 갖고 있던 차에 본지 이 기자에게 알려진 바가 되어 우선 개요라도 본지에 발표해달라는 여러 차례 청탁을 받았다. 그래서 우선 비견의 대강을 피력해보려 한다.
먼저 연대가 훨씬 앞서고 또 최근에 관심을 이끌고있는 광개토왕비에 대하여 얘기해 보려한다.

<잔 결된 글자 백97자>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면 무엇보다도 실제로 그곳에 가서 세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지만 지금 우리의 처지로서는 불가능한일에 속하므로 우선 탁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탁본 중에도 정조가 있으므로 될수록 좋은 정한 탁본을 택해야되겠고 또 제3국 인인 청말 학자의 탁본과 그의 석 문 등을 참고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본 수삼종의 탁본가운데는 현재 서울대박물관에 보존된 탁본이 비교적 오래된 것 같고 또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그래서 이것을 토대로 하고 그밖에 청말의 석학인 양수경의 「고려 호태 왕비」(석문도 붙어있음) 와 역시 청말 학자의 정문탁 의「고려국 영락 호태 왕비 석문 찬고」동을 참고로 하여 검토하러 한다.
먼저 본 비의 형태와 그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본 비석은 높이 약 6m67㎝, 너비 약1m50㎝ 내지1m80㎝, 두께 약 1m30∼40㎝의 거대한 부 등변 장방형의 자연석을 약간 손질해서 전후 좌우4면에 정연히 대형 한 례 체로 음 각한 공적기념비인 것이다.
왕의 본 시호는「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 왕」인데 이를 약해서 단지 호태 왕비라고도 하고 또 연호가 영락이므로 해서「영락대왕비」라고도 한다. 비의 정면(남)은 11행, 좌측(서) 10행, 후면(북) 13행, 우측(동) 9행으로 모두43행이고 매 행 41자이다. 그래서 총 자수가 1천7백9자인데 잔 결된 글자가 1백97자로 돼 있다.
건비 년대는 명시돼 있지 않으나 비문 중에 차왕 장수왕 2년 갑인(414년) 9월29일로써 산능에 천장하고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해에 비석을 세웠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비석의 크기와 내용>
위와 같이 결 자가 많이 있어서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문세가 통하지 않는 곳도 있지만 그 내용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입국의 유래와 약간의 계보를 서술하고 왕이 29(18세)에 즉위 한 후 사해에 무위를 떨치고 국력이 부강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되었는데 겨우 39세로 승하하였다는 것.
다음에는 비려 에 대해 친정 했다는 것. 백제·신라에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왕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과 7백 촌을 공 파 하였다는 것.
미복속의 숙신족을 복속 시켰다는 것.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 하였다는 것. 왜가 신라에 침입하여 신라로부터 청 병이 있게되자 왕이 보기5만을 보내어 왜인을 격퇴시켰다는 것. 왜가 대 방계(지금 황해도지방)에 침범하므로 이를 궤멸시켰다는 것. 동부여(동예)의 정벌, 능묘수호를 위하여 연호제를 세웠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근자 일본동경에서 벌어진 한·일 학자간의 논쟁의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왜이신묘년 내도해파백잔 ○○신라이위신민』이란 귀절에 있는 것 같다. 그 중에도「왜」자와 「도해파」3자가 일본의 조작 문 귀로 된 것 같다는 것이 재일 이진희의 설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일인의 조작 문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본 탁본가운데도 오래된 듯 하고 비교적 선명한 탁본이라고 생각되는 상기 서울대박물관 소장의 탁본과 상기 청말 학자들의 탁본·석 문 등을 신중히 살펴 볼 때 그러한 조작의 자취는 발견할 수가 없다. 조작이라면 어딘가 구석이 보일 것인데 그러한 구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대로 못 믿을 문구>
자획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묘해서 그렇게 교묘하게 조작이 있었다면 어딘가 흔적이 드러나야 할 것인데 그런 것이 드러나 있지 않는 것이다. 이점은 실지를 답사한 김종무 교장의 설에 적극 동의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 사학도로서 금석문자나 기타 문헌을 다룰 때에는 글자 그대로 볼 것과 그대로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을 구별하고 또는 활간 하는 날카로운 비판력이 있어야된다고 생각된다.
그 비문 중에는『이위 신민』이니『속민』이니『노객』이니 하는 문 귀가 많이 나타나고 있거니와 이는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아니 되는 예의 하나이다. 즉『백잔신라구 시속민 유래조공』이라든가 『왜이신묘년 내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라든가 『왜인 만기국경(신라) 궤파성지이 호객위민』이라든가『동부여구시추모왕속민』등이 그것인데 식견 있는 사학도 라면 누구나 이것을 글자 그 데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과시적 문구에 불과>
이것은 모두 과장적·과시적 문귀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견 있는 학자들도 그대로 믿지는 아니 할 것이다.
또 위의 문제의 초점인 글귀가 일인의 조작이라면 하필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부분의 왜에 관한 귀 절에도 그런 손질이 가야할 터인데 거기에는 그대로 되어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기타 문헌상으로 보더라도 이 당시 왜구의 침입이 활발했던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38년(신묘에서2년 후인 계사)에 왜인이 신라에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는 것을 나군이 요격 대파했다는 기사가 실려있고 그후 9년에 왕이 돌아가고 실성 왕이 즉위해서는 왜와 화해하고 질 자를 왜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본서기응신3년 조에 의하면 백제장사 왕이 즉위하여 왜왕에게 실례했다고 해서 왜왕이 장병을 보내어 백제의 무례함을 책망했는데 이로 인하매 백제인 이 장사 왕을 죽이고 사과하자 왜인이 아화왕을 세우고 돌아갔다는 설화적「스토리」가있다. 이는 광개토왕의 즉위 다음해에 해당되는데 물론 매우 과장적인 얘기에 불과하지만 좌우간 이때 백제와 일본사이에 다소 알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연구대상은 지명에>
그러므로 우리가 광개토왕릉 비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본비의 이러한 과장문자에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작 우리가 주의하고 연구할 대상이 된 다고 생각되는 것은 호태왕의 각처 정복 지명의 해석과 당시 국제정세, 특히 한일 관계사에 관한 검토에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나도 일찍부터 이러한 점에 유의해온 중이나 그 지명 중에 아직도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릉 비고」에 대한 논문을 벼르면서도 붓을 들지 못하고 있는 터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매양 스스로 안타까이 여기게 하는 바이다.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이 비석자체의 거대한 모습과 손바닥만한 글자로 전후 좌우4면으로 꽉 채운, 그 형식을 통해볼 때 당시 고구려인의 기상과 의욕이 얼마나 웅대하고 진취적이었던가를 상견 할 수 있다.
그리고 비의 서문에 있어서「천제지자모하백녀랑」이란 민족적 전래의 설화로써 시조의 출자를 과시하는 등 그 존대 사상, 그 주체의식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엿볼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 주체의식을 구호로 부르짖는 이때에 이 고구려인의 기상을 상기해 본다는 것은 한낱 회고로 그쳐서는 아니 될 줄 믿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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