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 <제자 문봉제>|<제30화>서북 청년회 (1)|문봉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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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8선을 넘어>
『우리는 서북 청년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 다나가 나가 38선 넘어 매국로 쳐부수자….』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좌익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서북 청년회의 우렁찬 행진곡이 끊어진지도 어언 26여년이 됐다.
생사를 내맡긴 피의 투쟁은 어느새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혀지고 좌·우가 소용돌이 치던 이땅엔 굳건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당시 사선을 넘나들던 서북의 젊은이들은 벌써 백발이 희끗희끗한 50대의 초로. 산천에「메아리」치던 서북 청년회의 이름도 낮설어 가지만 당시를 되돌아보는 우리에겐 여러가지 감회가 깊다.
서북 청년회-. 먼저 사람에 따라선 기억이 뼈아플 수도 있고 고마울 수도 있은 이름이다.
그것은 당시 맨주먹 하나로 피끓는 혈기 하나만으로 좌익을 쳐부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건졌다고 우리는 소용돌이에서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서청의 공이 결코 과소 평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공을 흐리는 이들 일부 과오는 우리들에게 더욱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의 무질서가 빚은 어쩔 수 없는 착오이겠지만 지난날을 냉철히 돌아보는 지금 결코 이에 자위할 수는 없다.
서북 청년회는 공식적으로 해방 이듬해인 46년11월30일에 결성되어 48년12월8일 대한 청년단에 통합되기까지 만 2년간 활약했다. 그러나 뒤에 나오겠지만 실제의 활동은 46년3월부터 시작되어 6·25 동란 중까지 도도히 굽이치는 것이었다.
서북청이란 간판은 관서·관북의 끝자를 따서 지은 것. 간판이 말해주듯이 38선을 넘어온 이북 5도 청년들의 총 동맹체이다.
한창 날릴 때의 서청 회원은 7만명을 넘었다. 서울에만도 각구 지부 아래 50여개소의 합숙소를 가졌으며 지방은 대전의 남선 파견대 총본부 (대장 임일 목사)를 비롯, 도마다 파견대를 둘 정도였다. 반공을 전매 특허품으로 알게까지 된 대규모 조직이었다.
서청의 성격은 이미 알 사람은 알다시피 철저한 극우였다. 우익의 최선봉에 서서 닥치는대로 좌익 세력을 쳐부수는 말하자면 거친 전위 행동 무대였다.
피비린내 나는 살상, 바로 그 연속이 서청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일부에서 서청을 백색 「테러」단으로 규정 지은 소이도 여기에 있다.
거친 행동 부대 서청은 실상 시대의 산물이었다.
해방 직후 좌·우익의 세찬 회오리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서울 형편이 행동의 서청을 불렀다.
이북은 소련군이 공산 사회로 다져가며 우익 세력의 숨통을 끊어간 반면 서울은 박헌영의 공산당까지 미군정 아래서 조직되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
북에서 쫓겨 정반대 세상을 그리며 정든 고향을 등져 온 우리 청년들로선 사실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서청 회원은 행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우익 세력은 진영을 채 가다듬기 전 이어서 좌익과는 힘의 「언밸런스」 상태.
물·불을 안 가리는 『박치기 기질』이 요구됐으며 맨주먹의 서청 회원들은 끼니를 위해서라도 거친 반공 전위 역을 청부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서청의 활약은 크게 ⓛ월남 청년들의 숙식 및 취업 알선 ②성분 조사 ③경향의 좌익 세력 타도 ④특수 공작 ⑤6·25 참전 등으로 결산된다.
몸둘 곳을 찾아 무턱대고 38선을 넘어 온 수많은 월남 대열을 모아 합숙을 시킨 일방 간단없는 피의 공방전에 타격대를 푸는 등 실로 악몽의 연속이었다.
거친 전위 행동대였기에 희생 또한 많이 따랐다.
첫 희생자는 47년 봄 충남 대덕군 농민 동맹의 「리더」 집에 불을 지르러 갔다가 장작개비로 맞아죽은 이창복 군 (당시 17·철원 출신).
그로부터 대소 공방전에서 30∼40명, 토벌전에서 4백여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청우회 조사) 38선을 넘나들며 지하 활동을 하다가 숨진 동지까지 합치면 희생자는 적어도 1천명에 가까울 것으로 추산된다.
『①남북 통일 ②공산당 타도 ③세계 평화에 공헌 ④복지 균점 사회 건설』 4개항의 행동강령을 우뚝 세우고 고향을 되찾을 날을 손꼽으며 반공 대열에 앞장섰다가 먼저간 동지들을 생각하면 남북의 대화가 트인 오늘, 감회가 남다르기만 하다. 한가지 앞으로 이 글을 써가면서 양해를 얻어둘 것은 모든 기록이 없어져 기억에만 의존 하다보니 연대 등 다소 정확치 못한 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모든 얘기는 과거의 사실을 되살렸을 뿐 현 정세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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