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우방 참전부대>(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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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룩셈부르크」소대>1개 소대로 구성된 「룩셈부르크」지원병은「벨기에」 지원병 대대 소속으로 편성, 파한 되어 한국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행동을 함께 했다.
이것은 당시「룩셈부르크」와 「벨기에」가 외교 관계에 있어서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출병에서는 이렇게 행동을 같이한 것이다.
따라서「룩셈부르크」군이 한국에서 벌인 전투 활동은 곧 「벨기에」 대대의 활동으로 표현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51년 4월 연천 지방에서 맞이한 중공군의 1차 춘계 대공세나 51년10월 철원 동북방 학당리 전투, 52년4월 같은 지역인 연천에서의 전투는「룩셈부르크」군이 참여 16개국 중 가장 적은 규모였으나 우방 어느 나라 군대에 못지 않게 용감히 잘 싸웠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1년4월 중공군의 1차 대공세는 「룩셈부르크」군이 한국 참전 3개윌 만에 맞이한 큰 전투였지만 침착하게 맡은바 임무를 수행했다.

<인해 전술에도 침착하게 대전>
더구나 이때의 중공군은 아군보다 10배를 넘는 대규모 병력으로 이른바 인해 전술을 감행했는데도 이 소대는 「벨기에」대대와 함께 철수하는 아군, 특히 영연방여단의 후미를 잘 엄호하여 「유엔」군의 피해를 덜어주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중공군의 1차 춘계 대공세가 있었던 당시「유엔」군사령관의 작전보고서를 보면 적의 공격 규모가 상장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이때의 보고서(51년4월16일∼ 4월30일)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대포 등의 중화기를 구비하여 신규 부대로 구성, 서부 전선 일대에 집결된 중공군은 4윌22일과 23일 밤사이에 첫 번째 총 공격에 나섰다.
주요한 공격은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 사이 25「마일」 전선에 집중되었다.
동시에 이 지구내의 서방 및 서남만에서 적은 서울의 동북 임진강에 다리를 놓았다.
이 중요 공격 지구의 동쪽에서도 적은 꽤 명렬한 공격을 해 왔는데 강원도 임제 동남쪽에서 「유엔」군 전선을 거의 4 「마일」이나 뚫고 들어온 것이 적에게는 유일한 성과였다.
「유엔」군은 각 부대의 안전을 유지하고 적에게는 최대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길서 정연하게 후퇴했다. 대포의 집중 사격과 부분적인 반격 및 전거·보병 혼성 기동부대의 출격은 적의 총 공세에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사실상 적은 이 기간 동안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적의 중요 공격 지구 안에서 영 국군, 「터키」군. 「그리스」군 부대들은 많은 공훈을 세웠다.
사상자들마저 돌보지 않고 적은 「유엔」군 부대를 고립시켜 포위하려고 애썼으나 대체로 실패로 돌아갔다.
적의 총공격은 50「마일」의 서부 전선에 중공군 9개 군단을 투입했고 이밖에 도3∼5개 군단의 예비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부 전선에 집결된 적의 총 병력은 중공군 34∼40개 사단과 북한 공산군 4개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적은 서부 전선을 공략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은 전 병력을 모두 집중 시켰음이 분명했다. 적은 이 기간 동안 한국 전선에 실제로는 초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다.』
즉 중공군은 서부 전선 중에서도 임진강을 끼고 서울로 향할 수 있는 주요 길목인 연천 지방에만 중점적으로 30개 사단 병력 이상을 집결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때의 「유엔」군은 질서 정연했다. 비록 일시 퇴각하는 형세였지만 적에게는 많은 피해를 주었고 아군의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았다.
또한「룩셈부르크」소대를 포함한 「벨기에」대대는 임진강에서의 전투를 끝내고 미국 대통령 및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각각 부대 표창을 받았다. 51년에 파병된 제1소대와 교체하여 52년3월 일선에 배치된 제2소대는 역시 「벨기에」 대대의 일원으로 6월30일에 는 한국군 제1사단이 맡고 있던 금화∼철원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철의 삼각지로 연결하는 이름높은 격전지인 백마고지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의 활동은 주로 「포로 잡기 작전」이나 그밖에 고지 공격이었다.
8월 하순부터 12월까지 이 지역에서의 활동은 특히 눈부신 것이 많았다.
그 때의 적은 활발한 정찰 활동과 함께 명렬한 포격을 계속했다. 매일 같이 하루 평균 1백여발의 포탄이 집중되었다.
9월25일과 26일 이틀 동안은 중공군이 전초 기지에 나가 있는 「룩셈부르크」 소대에 집중 공격, 소대장이 부장하고 그밖에 6명이나 사상자가 있었지만 끝까지 진지를 고수, 적의공격을 물리쳐 미국으로부터 동성훈장을 받았다. 다음은 전회에 이어 본사 장덕상 전주 불 특파원(현 외신부장)이 「인터뷰」한 참전용사들의 회고담을 들어보겠다.

<인구 비율로는 가장 많은 출병>
▲「루디·튀티」씨(당시 소위·현「룩셈부르크」농업성 근무·44)

<「유엔」이 참전을 결정했을 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외교적으로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은 함께 1개 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지원병을 모집했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2개 소대가 교체하여 연병력 약 1백명 정도로 참전 16개국 중 숫자로 보아서는 가장 적지만 인구 비율로는 가장 많았다고 봐야지요. 당시의 「룩섹부르크」인구가 30만명 정도였으니 인구 3천명에 1명 꼴로 한국전에 참가한 셈이 됩니다. 「와그너」중위가 지휘하는 우리 소대는 「벨기에」대대에 배속되어 51년 임진강 전투, 52년 철원 지방 및 백마고지 등에서 싸웠습니다.
52년 7월부터 9월까지 역 3개월 동안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이 흐르는 지역에서 비교적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이곳은 철의 삼각지 서쪽 지역으로 한국군 9사단이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7월초부터 우리는 중공군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방어와 정찰임무에 주력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맡고 있었던 진지는 역곡천을 앞에 두고 3개의 작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8월20일께에 적의 맹렬한 포격을 받아 희생자를 냈습니다.
적의 포격이 사흘 간 계속되자 「벨기에 」 대대장인 「비바리오」소령이 OP에 나가 보겠다고 나서자 대대장 운전병이었던 「룩셈부르크」소대 「스투츠」하사는 자기가 운전하여 모시겠다면서 차고로 가는데 포탄이 날아와 결국 사망했읍니다.
「스투츠」하사는 1차 파견대로 1년 근무 임기를 끝냈으나 계속 복무하겠다고 지원했던 6명중의 1명이었습니다.
또 「스투츠」하사는 51년에도 이 지역에서 전투를 겪었기 때문에 지리를 잘 알아 대대장 운전병 노릇을 한 것이죠.

<불리한 지형서도 반격 작전 펴>
역곡천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해 있는 이 기간은 낮에 는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적과의 거리가 얼마 안 되는 데다 서로 빤히 쳐다보고 있은 형편이어서 움직이기만 하면 포탄이 날아와요.
9월 하순에 다시 한 차례 대접전이 있었읍니다. 그 후 별 다른 교전이 없이 약 3주일 가량 지나고 난 다음 「벨기에 」 대대가 정찰 임무를 띠고 출발했을 때 중공군이 일제 공격을 해 왔읍니다. 그 때의 정찰 임무는 적이 강을 건너 공격해 올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이었어요. 적의 공격은 3개 고지에 일제히 집중되었고 적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강을 건너오는 것 같았어요. 우리 소대는 두 번째 고지에 있었는데 3개 참호가 적의 포화로 모두 무너졌어요. 앞의 참호가 무너지면서 이 안에 우리 소대원 3명이·매몰되어「모레스」 하사가 매몰된 소대원을 구출하려고 가다가 적의 포격에 다시 쓰러졌어요.
적이 공격을 시작하자 「벨기에」대대 본부에서도 반격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는 백병전이 벌어졌옵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의 전투가 몇 시간 계속되었는데 그때 영연방여단에서는 적의 후방을 맹렬한 포격으로 강타하여 적 후미가 무너짐으로써 공격해 온 적의 사기가 꺾어지더군요. 이날 하룻밤 사이의 전투에서 우리대대는 12명이 죽고, 17명이 부상했는데 나도 그때에 부상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보니 적의 시체는 30명이 넘는 것 같았어요.>
▲「로베르·윌러」씨(당시 「룩셈부르크」소대 준위·현 사업·56)

<51년4월 중공군의 첫 번째 대공세가 있기 며칠 전에 나는 소대원을 데리고 강을 건너가 적정을 살피는 정찰임무를 맡고 떠났습니다. 사실 그때는 적의 대공세가 있으리라는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6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나가다보니 전방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어요. 사병 2명을 보내 확인했으나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계속 전진하려는데 돌연 『호야』『호야』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우리가 재빨리 엎드리자 앞에서 수류탄이 터졌어요. 이곳에서 몇 분 동안 교전하고 되돌아 왔는데 이 정찰로 중공군의 공격이 곧 있을 것을 예상할 수 있었어요.
그 때 우리 정찰대의 임무는 중공군이 어느 정도까지 진출해 있으며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중공군은 상당히 가까운 지역에 밀집해 있었읍니다. 정찰임무는 성공한 셈이었으나 적의 공격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아군은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한국 참전용사들은 이따금 모임을 갖고 당시를 회상하곤 합니다.>

<적의 3일간 집중 포격에 항전>
▲「장·게리스」씨(당시 소위·현「멜기에」참전용사회 부회장·왕립 군사학교 인사과장·49)

<「벨기에」대대가 학당리 전투에 참가한 것은 10월 중순이었어요. 연천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전선은 말이 아니더군요. 참호는 모두 파괴되어 엉망인 데다가 시체만 그득했습니다. 철조망이나 지뢰 매설 등 방어선 구축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구요.
게다가 중공군은 약 5백m 전방에서 우리보다 훨씬 높은데 있으면서 매일같이 포격을 해왔었어요. 우리가 겪은 한국전 중 그때가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적은 사흘 동안 포격만 하다가 4일째 되는 날에 공격해왔어요. 이사이 우리는 야간에 절망도 치고 지뢰도 묻는 등 방어선을 어느 정도 만들어 놓을 수 있었어요.
사흘 동안 포격을 견디느라고 병사들이 상당히 피로해 있었는데도 적의 공격을 잘 막았어요. 적은 사흘간의 포격으로 아군이 저항할 능력이 없으리라고 속단하고 공격한 것 같아요. 의외로 반격이 강해지자 공격이 주춤해지더군요. 우리는 이 진지를 고수하여 하루를 버텼습니다.
다음날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3km나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아군은 10여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 더 큰 피해는 없었다. 한편 「벨기에」 참전 용사회가 구성되어 있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주요일지(1952년9월5∼8일)
※5일 ▲「벙커」 고지서 격전 ▲공중전서 「미그」 3대 격추, 7대에 손해
※6일 ▲B역 북한 각지를 야간 폭격
※7일 ▲공산군 개전 이내 최대 규모 포격 24시간에 3만5천발 발사 ▲공중전서 「미그」 기 6내를 격추파 ▲「무초」미 대사, 이 대통령에 이임인사 ▲「이집트」군부, 전정객 32명 체포
※8일 ▲공산군, 수도고지 주변의 한국군에 1만3발의 포격 ▲변영태 외무장관 한일회담 재개용의 비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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