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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제29화 조선어학회 사건(1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윤재의 상해행>
조선어학회와 상해임시정부사이의 연관이란 사실 터무니없는 올가미였다.
조선어학회 간부들의 행동을 과거에서부터 하나하나 조사하던 경찰은 1927년8월 이윤재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일을 보던 김두봉을 만나고 온 일을 밝혀냈다.
이윤재는 사전편찬 일을 도와달라고 김두봉을 만나러 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사전편찬에 열을 올리고 있던 이윤재는 조선광문회에서 이 분야의 일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김두봉과 함께 일하기 위해 귀국을 권유하러 찾아갔었다.
조선광문회는 1910년 우리 나라 고서를 출판하기 위해 최남선이 세운 모임이었다. 이 광문회에서 주시경 권덕규 이규영 김두봉 등이 「말모이」(사전)를 편찬하기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시경이 작고하고 경비가 없어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927년6월 계명구락부에서 이 사업을 인계 받아 계속하기로 했지만 이것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지되고 말았다.
이윤재는 사전편찬 일이 자꾸 중단되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상해까지 찾아가 『사전편찬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니 과거의 경험을 살려 함께 일해보자』고 김두봉을 간절히 설득했다. 그러나 김두봉은 『목적한 일을 이루지도 못한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고국에 돌아가겠느냐』고 한마디로 거절하고 말았다.
김두봉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해외에 나온 처지에 아직 독립도 안되었는데 어떻게 고국으로 돌아가겠느냐는 말이었다.
이윤재는 하는 수 없이 『그렇다면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사전편찬을 위해서 그동안 써놓은 원고라도 빌려주면 가지고 돌아가 사전편찬의 기초로 삼겠다』고 부탁했다.
김두봉은 『그것도 손을 좀 더 대어서 정리하기 전에는 쓸 것이 못된다』고 또다시 거절했다. 그러나 사전편찬 일에 온 정신을 쏟고있던 이윤재는 사전편찬이란 쉬운 일이 아니며 몇몇 개인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고개를 숙여 간곡히 당부했다.
『아직 정리를 다 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나중에 부쳐 주시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다된 원고만이라도 주실 수 없읍니까?』
『그것도 안될 말이지. 만일 그 원고를 정 원하거든 내 생활비를 좀 보태주면 시간을 내어 수정하여 보내도록 하지.』 결국 김두봉은 이윤재에게 2백원의 생활비를 요구했다.
이윤재는 그 당시 2백원이란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고국에 돌아가서 곧 융통해 보낼 터이니 원고는 틀림없이 잘 정리해 보내주십시오』하고 쾌히 약속하고 돌아왔다.
이윤재는 고국에 돌아와 백방으로 이 거금을 마련키 위해 노력한 끝에 안국동에서 중앙인서관을 경영하는 이중건에게서 2백원을 희사 받아 상해의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김두봉으로부터는 원고 커녕 편지하나 보내온 것이 없었다.
얼마 후 동아일보 특파기자로 상해에 갔었던 김두봉의 동생 김두백을 통해 전언이 왔다.
『사전원고 정리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니 그것보다도 신 철자법을 속히 보급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대중이 많이 읽는 서적을 신 철자법으로 많이 박아내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또 김두봉은 그 후 김양수가 미국유학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상해에 들러 만났을 때도 똑같은 전언을 해 왔었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일본경찰은 조선어학회가 곧 상해임시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독립을 목적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또 이윤재가 김두봉에게 전한 2백원이란 돈도 『조선어학회가 김두봉에게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쓰도록 보낸 게 틀림없다』고 생트집을 쓰며 이윤재에게 이에 대한 자백을 하도록 혹독한 고문을 마구 가했다.
다른 동지들에게도 똑같은 심문내용을 가지고 조선어학회가 상해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자백을 하라고 닦달질했다.
또 하나 경찰은 1931년1월10일 조선어연구회라는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고친데 대해 트집을 잡았다.
즉 상해임시정부에서 비밀지령이 올 때 일본인 기관인 조선어연구회로 잘못 전하여진다면 비밀이 탄로 날 위험이 있어 고친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이름을 바꾸기 전인 조선어연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단체였는데 명칭을 바꾼 것은 그 당시 일본인 「이또」(이등간당)가 같은 이름의 「조선어연구회」란 학술단체를 만들어 태평로에다 사무소를 두고 일본인을 상대로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편 「조선어연구」란 월간잡지를 간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서신이 서로 엇갈리어 잘못 전달되는 일이 많아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리 편에서 우리의 모임이름을 바꾸기로 하여 정식 승인을 받아 바꾼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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