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제28화 북간도(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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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경성의 수난>
25년 고비로 북간도서의 독립군의 기세는 차차 시들어갔다.
독립군들은 하나둘 검거되거나 아예 「러시아」로 망명,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20년 초기엔 돈화를 근거지로 했던 독립군들도 점차 북쪽으로 동이, 30년께는 동경성에 많이 모여있었다.
동경성으로 말하면 옛 발해의 도읍지여서 우리동포들이 약2천호 살고 있었고 일본관헌의 손도 그다지 뻗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는 한때 북로군정서의 총재이던 서일(21년8월26일 마적의 습격을 받아 죽음)의 아들 서윤제가 와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또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이 있고, 뒤에 군정서가 정의단으로 개편되어 김좌진부대로 됐을 때도 참모장으로 청산리전투에서 큰공을 세웠던 나중소와 안희재 최관 이계림이 있었다.
또 대종교의 윤단해가 있었다. 대종교는 단군시조신을 믿는 종교로서 1909년 나철이란 사람이 중광한 것으로 북간도에는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이 종교인들은 표면상으론 다른 종교인과 같았지만 서일은 군정서의 총재인 동시에 이 교의 「영도」로서 활약했고 교세가 크게 번창했다. 북간도의 교인가운데는 정안립 박찬익 신팔균 김동삼 서상용 김좌진 조성환 이범석 나중소 현천묵 현천극 김규식 최해 강희 석준 이범윤 홍범도 신채호 이청천 이시영 등이 있고 본국에서는 김윤식 지석영 주시경 안재홍 나운규 안호상 정인보 박은식 등등 명사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대종교 교도들이 이처럼 활약했으나 차차 시운이 기울자 윤단해 등은 동경성에서 다시 단군천전을 두어 교세의 재확장을 기도했던 것이다. 또 안희제는 발해농장이라는 큰 농장을 갖고있던 대구부자 김태원과 손잡아 발해소학교를 세우려고 했었다. 그러나 동경성에서 투사들이 다시 모인다는 소식이 일본관헌에 들어갔고 일본 관헌은 1930년을 전후해서 북간도에서 일제검거에 나서 지사들이 대량 붙잡힌 것이었다. 이때 동경성에서도 대부분 붙잡혔다. 윤단해 서윤제 최관 등은 고생 끝에 풀려났으나 나중소 형제는 사형되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이규 등이 중심이던 대한정의군사도 힘을 잃었다. 이범윤이 총재였고 김현규가 사령관이던 의군부도 1921년의 흑하사변 이후 기울어 이미 흩어져 없어졌을 때였다. 신한촌에서 붙잡힌 진학신은이 의군부의 참모장이었던 것이다.
김성규·홍두식이 주동이던 광복단·의민단(단장 방용우) 대한신민회(김규면 김성배 유득황 등) 총판부, 홍범단의 대한독립군단도 조직적인 항쟁은 할 수 없게 되어갔다.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안희제 등은 2세 교육밖에 길이 없음을 인식, 재원을 마련하여 신경의 일본대사관허가를 얻어 소학교를 세우는데 성공했지만 뒤에 발해중학교를 세우겠다고 신청했을 때는 기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전 동경성에는 최남선이 2번이나 와서 앞서 영사관을 태운 조두용을 만나고 갔다.
조두용은 동경성에서 동만농사주식회사를 세우고 안희제와 같이 육영사업에 손대고 그 뒤 모단강에서 왜경에 의해 검거되었었으나 무사했다(이 조두용의 아들 조동벽씨가 지금 부산교대 미술과장으로 있다).
그러나 이 무렵에 북간도의 독립지사들 가운데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공산당에 기우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겼고 이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위해 별별 일을 다했다.
공산당이 가장 많았던 것은 마록구와 동불사였는데 한때는 중국공산당 이립삼의 지시로 「혁명」한답시고 살부회를 조직, 하룻밤에 2백70명의 동포를 살육하는 만행을 벌이는 등 형세가 사나운 적도 있어 동포들의 생활은 일본관헌과 공산당의 위협 속에 편안치 않았다.
이 같은 혼란상태는 1922년께부터 만주국이 되는 32년까지 약10년 동안 계속 되었던 것인데 결국 극렬분자들은 모두 「러시아」로 망명하는 것으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 무렵에 이상설과 함께 서전의숙을 세우는데 참가했던 김우용이 산골길에서 애국청년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났다.
김의 본명은 김동환이었다.
서전의숙이 없어졌을 때 이상설과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그 곳에서 이동휘를 알게되어 그후 이동휘의 비서격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1920년께 이동휘가 상해로 갈 때 데리고 갈 줄 알았으나 혼자만 가버리자 크게 낙심해 있었다. 이 틈에 왜경이 손을 써 김우용이 그만 왜경과 접촉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고 일본경찰은 김에게 지하에 스며들거나 표면상 정당한 직업을 갖고 안주하는 독립군들을 찾아다니면서 일본관헌을 위해 「자수권고」를 하라고 강요하여 할 수 없이 여기저기 끌려 다녔는데 독립군의 청년들이 그를 「배신자」로 단정, 산골길에서 습격, 살해한 것이었다. 김의 과거행적으로 보아 배신할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인데 애석하게 죽은 것이다.
(10월19일자 제7회 연재 때 이상설이 김하규와 남위언을 규암제에 보내 도와주었다는 것은 규암제의 김약연이 서전의숙으로 보낸 것이 반대로 표현된 것으로 바로 잡습니다. 규암제는 1901년에, 서전의숙은 1906년에 생겨 북간도서의 숙의 시초는 규암제입니다.)
40년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강압이 심해 한국인을 많이 도와주었던 외국인선교사들이 모두 북간도를 떠나게 되었다. <계속> [제자 이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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