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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제28화 북간도(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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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한촌의 최후>
한인들이 노령에 이주한 것은 극히 오랜 역사가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1884년에 한·노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주한 한인에 대한 국제조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인들의 이주는 이보다 훨씬 앞섰던 것은 분명하다.
이 조약에서는 1884년 이전에 이주한자는 노국 국적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극동지역(연해주)에 토착할 것을 허가하고 있다. 이 때의 이주자는 1천8백45가구에 9천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의 한인거주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리크리스크」 등 이른바 소·만 국경에 연해 있었고 대부분 광산노동자와 영세농민이었다.
이 신한촌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893년께부터이다.
「러시아」는 이 때 한국인만을 규제한 것이 아니고 청국인도 아울러 규제했는데 대체로 ⓛ가복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청국인과 한인 ②각종 건축업에 종사하는 양국인 ③벽돌 굽는 일에 종사하는 자 ④구시가에 사는 수위직 한·청 양국인 ⑤증기 제분소와 제철소에서 일하는 양국인은 법에 따른 제한구역에 살도록 지시를 내렸고 이것이 실제로 실시되기는 1902년께부터였다. 이것이 신한촌의 시작이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시가의 서북쪽 끝에 한국인들을 몰아살게 했다. 「러시아」말로는 「카로스케·스라붓가」(한인거주지역)라고 했다.
이곳은 바위가 솟아있는 언덕배기로 도심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식수마저 없는 불모의 변두리이다.
1백m나 돼 보이는 낭떠러지 밑에는 「아므르」만의 파도가 넘실거렸고, 겨울엔 이것이 얼어붙었다. 따라서 겨울엔 언덕배기를 기어 내려 얼음 위로 걸어서 북간도로 왕래할 수 있었다.
이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동포들의 주식은 쌀·조·피·팥·콩이었는데 대체로 하루 두끼 먹는 것이었다.
점심 때는 밀가루를 흔히 사용했고 아침·저녁은 「우반」이라고 하는 쇠고기 비빔밥 같은 것을 잘 먹었다. 아침밥을 10시쯤 먹고, 저녁은 하오 5, 6시쯤, 중간에 홍차를 마시는 풍습이 있으나 동포들은 맹물 끓인 것을 먹을 뿐이었다. 옷은 양복이 주였다.
집은 대체로 「러시아」식이 많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판잣집에 살았다. 대체로 신한촌의 집은 좁고 불결했던 것이다.
술은 「보트카」와 소주를 닮은 「두주」라는 것을 마셨다.
그러나 이같이 어려운 환경에 사는 동포들이지만 대부분 지사들이었기 때문에 가난은 문제되지 않았다.
나는 신한촌에 가자 홍이표라는 사람 집에 기거하면서 신한신문의 「프린트」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약 3천장을 찍는 것이었다.
이 신한신문은 한국인을 위해 발간되는 것인데 내가 있을 때가 신문에 관여하던 사람으로서 장기영·김하석 등이 있었다. 장지연도 한 때 편집을 맡았다는 얘기였다.
이곳엔 신문뿐 아니라 한국인 학교·교회 등이 있었다. 교회에는 우기욱이란 사람과 채계화란 여인이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신한촌에는 한국인 독립지사들이 모이는 곳이긴 했지만, 일본인이 받는 최혜국 대우에 비하면 엄청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치외법권을 누렸으나 우리 동포는 그렇지 못해 일본인 밀정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 독립군의 내막을 살살이 조사하고 있었다.
더우기 1918년의 무오독립선언, 1919년의 3·1운동과 이에 뒤따른 갖가지 항쟁사건이 북간도에서 일어났는데 그 모든 사건에 있어 신한촌이 기지로서 이용되고 있음을 안 일본군은 1919년10월7일 북간도에 출병했던 19사단과 21사만의 병력을 끌어들여 1920년4월5일 새벽 신한촌을 무력으로 짓밟아 버렸다.
즉 일본군은 갑자기 출동하여 「러시아」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시내의 요새를 점령했다. 「러시아」군은 한나절의 싸움 끝에 손을 들었다. 이어 일본군은 산너머에 있던 신한촌에 달려들어 학교와 민가를 불태우고 한국인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항일독립운동지사를 일제 검거했는데 대부분의 지사들은 피신했으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진학신 최정하 박무성 한성인 등 39명이 붙잡혔다.
또한 「러시아」군이 일본 하에 항복하므로 「러시아」군에 들어가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포로가 되어버렸다.
일본군은 「리크리스트」동 연변일대를 동시에 공격하여 「리크리스크」에서는 1919년11월부터 와있던 상해임시정부의 재무총장 최재형 등 67명이 붙잡혔다. 그들은 최재형을 비롯, 엄주필·황경섭·김리박 등 4명을 현장서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랫동안 북간도의 독립운동기지로서 이용됐던 신한촌이 이 같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잿더미로 화하자 지사들은 보다 깊숙이 「러시아」로 망명하거나 흩어졌다.
신한촌을 소각한 일본측은 소위 「시베리아」철병으로 북간도에 돌아와 집결하고는 이 때부터는 간도 토벌을 하게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1920년) 11월에 청산리에서 독립군의 역습을 받아 참패하게되는 것이며 우리로서는 피맺힌 한을 속 시원히 푸는 것이 된다. <계속> [제자 이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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