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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제28화>북간도|이지택(제자 이지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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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명동의 한인단체>
명동이 북간도의 중심이 된 것은 교육뿐 아니라 사회활동·독립운동이 모두 명동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김약연 등은 1909년에 명동학원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간민회라는 것을 세웠었다. 그리고 스스로 단발령을 내렸다.
이 단체는 이주 한국인들이 방임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걱정한 유지·지사들이 동포의 힘을 모으기 위해 가진 조직인데 처음 간민회라 불렀지만 뒤에 간민 교육회라 불렸다.
이 단체의 주동자는 박무림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든 뒷바라지를 김약연이 맡고 있었다.
김약연·박무림 등이 이동춘이란 사람을 통해서 청국관청인 연길도윤에게 통고하여 묵인 받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동춘은 구 한국정부 때 중국말 통역으로 원세개를 상대했던 인물이다.
이때의 참여인사는 전 북간도의 유지를 망라한다는 것이었지만 역시 명동이 중심이 되어 김약연·구춘선·정재면·강봉우·장석함·김립·윤해·박상환·정안립·오병묵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그 때 북간도의 지도적 인물인데 특히 구춘선은 가장 연장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국자로 북쪽지방의 지도였다.
이러나 이 간민회는 일본영사관이 들어선 후 폐쇄령이 내려 할 수 없이 간판을 내리고 간민교육회라고 개명하게 되었다.
즉 동포들에 대한 행정적인 면까지 손을 대려고 했지만 허용 안돼 자제교육만 하는 것으로 후퇴한 것이다. 아마 1911년으로 짐작이 간다.
뒤에 이 모임의 임원은 약간 변동이 있어 이동춘이 부회장이 되기도 했고 박찬익의 이름도 나왔지만 분명치 않고 김약연은 항상 「장」직은 맡지 않고 있다가 1917년에 처음 회장직을 지냈다. 1918년에는 조직 간사였다. 그는 언제나 뒷바라지만 했다.
이와 같은 단체의 본부가 명동에 있게 되니 자연 독립운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지만 일본관헌들이 직접으로 명동에 대해 박해를 가하지 않은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그 때 일본의 정보당국은 김약연을 「부령선인의 수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명동에서 교육받은 자들이 차츰 간도에 퍼져 지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터에 명동에 손을 대면 발칵 뒤집히는 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자연스럽게 소망할 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12년 5월9일에 용정촌에 큰불이 났다. 약5백 가구의 집이 불탔다. 이 중 4백가구가 한국인의 집이었다. 이때 재해 구제를 싸고 청국과 일본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났다.
일본 영사관측은 한국인의 환심을 사려고 수백 섬의 쌀을 실어다 죽이라도 끓여 먹도록 구호했다. 그렇지만 이 같은 구호로는 충분하지 않아 재민들 가운데서는 집터나 망을 팔아 버리는 사람들이 잇달았다.
그러자 청국관청은 한인 소유 땅을 되도록 많이 사들이려고 했다. 즉 한국인의 상권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다. 일본측은 한국인의 세력이 약화하면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고 영사관 안에 구제회라는 것을 만든 것이다.
이 구제회를 통해서 집이나 집터를 담보로 하여 자금을 대출해서 집이나 땅을 파는 것을 막아준 것이다. 그래서 이 통에 용정조선인회라는 단체가 생겼는데 이 단체에 가입한자는 약60명밖에 안되었다.
이 용정조선인회는 1917년에 조선인거류민회라는 단체로 바뀌면서 자연 소멸했지만 친일단체라는 것 때문에 시종 유명무실했고 오직 간민회만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김약연이 명동의 젊은 학생 4명을 북경으로 유학 보냈다. 새 인물을 길러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며 명동학교를 평양의 대성, 정주의 오산과 같이 민족정신의 터전을 삼으려고 한 것이다. 이때 김약연이 보낸 학생은 문재린·김석관·윤영석·김정훈이었다.
윤영석은 북간도의 순국시인 윤동주의 아버지이며 김정동은 김약연의 둘째 아들이다.
문재린의 처남에 김진국(서울중·고 영어구사로 있다가 6·25때 납북)이 있다. 이 사람은 현 경희대 초급대학장 윤영춘씨의 고모부였다. 이들은 김약연의 학비부담으로 북경에 가서 새 학문을 공부했는데 김석관과 윤영석은 북경대학을 나왔고 김정열은 고교와 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 무렵에 여러 지방에서 한인단체가 생겨났다.
유생들의 모임인 유림계는 오래 전(1900년께)부터 있었으나 통감부 파출소가 생긴 뒤 일본사람들의 파괴공작으로 분열을 일으켰고 1911년에 한족회가 생겼으나 전 북만 지역을 망라한 것으로 유하현 삼원보에 있었다.
명동에서는 명동학생친목회라는 것이 있었다.
지·덕·체의 세 가지 교육을 닦자는 것인데 교직원·졸업생·학생을 모두 망라하는 것이며 총무·의사·강론·운동·찬성의 5부가 있었다.
이 친목회는 뒤에 단지동맹 등 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는데 이 같은 단체가 세력을 떨쳐 자연 독립 운동자들이 모여들었다. 명동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지하신문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17년께부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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