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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후계로 지목된 요문원·장춘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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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두명의 문학평론가에서 일약 모택동의 후계자 물망에까지 오른 요문원은 이른바 문화혁명의 주창자로서 주로 다른 사람들의 문학적 동기를 공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온 상해에서 정치경력을 쌓은 정치국원이다.
문혁 당시 중앙문화혁명소조원 겸 상해임시혁명위원회 의원이었던 요가 모택동의 왼팔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랭킹」 1백98위였던 그가 68년9월 혁명위 전국성립 축하기념식에서 일약 「랭킹」 7위로 부상하면서부터였다.
문예비판에서부터 점화된 문혁 과정에서 요의 필봉이 처음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65년11월 문혁에 불을 질렀다는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라는 글을 상해 문회보에 실으면서 비롯됐다.
1960년에 씌어진 작품 『해서파관』에서 작가 오합은 전 국방상 팽덕회와 전총참모장 황극성의 파면을 들어 중공사회를 풍자하는데 성공했던 것.
이미 64년부터 중공의 사학자 주곡성을 보수주의자라고 비난함으로써 반모계열을 비판하는데 앞장 서온 요는 오합의 이 작품을 반당·반사회주의·반「프롤레타리아」적인 동시에 반모적이라고 낙인찍었다.
이어 요는 공산당의 두 가지 비진실성을 풍자한 등척과 요말사 오합이 오남성이란 필명으로 쓴 수상집 『삼가촌찰기』를 가장 해독적인 작품으로 혹평함으로써 모·임과의 반류소기 투쟁에 선봉역할을 했다.
절강성출신으로 당년 41세인 요는 중국공산주의 청년단 제3기위원(58년), 상해시 당위 제2서기, 『해방일보』 『상해신문』 주필을 역임, 문혁소조원으로서 문혁의 기수로 활약했다.
67년2월 홍위병 대표단을 이끌고 「알바니아」를 방문한 그는 귀국 후에도 대외문제 처리에 바빠 군부와의 알력에 말려들지 않는 행운을 누렸다. 『도용의 2권의 책을 평한다』를 비롯한 몇몇 주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한 요는 모 주석과의 각별한 관계로 인해 그의 사위라는 풍설이 나돌고 있다. 그의 처 개력이 강청의 전남편 소생이라는 것.
요와 함께 모·주의 후계자로 지목된 장춘교는 현 상해시 혁명위원장이며 구전대회에서 역시 정치국원으로 선임되었다.
산동성 출신으로 당년 54세인 장은 문혁 바람을 타고 출세가도를 달린 소장파의 실력자로서 요와 마찬가지로 모택동의 처 강청과 가깝다.
장은 1950년 신화사통신 화동분사부사장, 54년 『해방일보』사장, 63년 상해시 당위선전부장을 역임했고 66년8월에는 당 중앙문혁소조부 조장으로 활약했다. 67년2월 다시 상해로 내려가 상해시 혁명위 주임이 된 장은 동년 5월에는 남경부대 제1정치위원겸 상해경비구 제1정치위원의 요직을 맡았다.
그는 「닉슨」미대통령과 「다나까」일본수상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이들을 맞아 접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정령 등을 비판한 수필집 『금조집』이 있다.
요문원이나 장춘교 둘 다 일찌기 문예비평가로부터 시작, 정계의 관심을 모은 인물이다. 또 이들 둘은 모 주석의 아내이며 문혁의 막후 지휘자였던 강청의 입김이 서린 당내 젊은 기수로서 모택동에 대한 충성심이 문혁을 통해 입증된 인물들이다. <김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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