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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심은 한국의 얼|백제인 박사 왕인의 위업 (8)|생생한 고려촌 사적|김창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무장국의 고려촌은 「고마무라」로 불리는데 지금 기옥현입간군에 「고마」 (고려) 신사와 함께 있다. 원래 지금의 입간군일고정을 중심으로 동서 80리·남북 30리 전역을 일컬었으며 산성국목진천 연안에 산재하는 맥씨족 (고구려인)이 주로 토목과 개간 등 개발에 종사해왔다. 나량조의 영귀 2년 (서기 716년) 준하·갑비·상모·상총·하총·상륙·하야의 7개국에 살고 있던 고려인 1천7백99인을 무장야국에 집단 이주케 하여 고구려군을 설치한 것이다. (속 일본기)
그로부터 약 1천2백년을 지낸 고려군은 기옥현입간군에 병합돼 벌써 군명으로서는 고려가 없어졌지만 「고려」 라는 이름을 붙인 지명은 아직도 허다하다. 「고려촌」을 위시하여 고려항, 「고려천촌」 「남고려촌」 고려상 「고려천」「고려왕지묘」「고려신사」「고려산성천원」 등이 존속돼 있다. 그 어느 곳이나 고려군의 사적임을 뜻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고려촌연기) .
당시 무장야국은 고대 일본 제도 소재지와는 거리가 먼 변방으로서 기내 방면에 비해 땅이 광막하고 인종이 희박하며 비옥한 농토와 풍요한 산수 등 농토 개발에 좋은 지대였다.
그들은 여기서 농경 기술과 농기구·종자 등을 개량하는 한편 다마천 강변에 상목을 가꾸어 길쌈 기술 (명주)을 전파했다. 옛날의 그 고려 도자기와 「구레하도리」 (오직) 는 지금까지 유명하다. 그리고 「죠오부」 (조포) 와 「기누따」 (침) 의 지명은 아직도 그대로 있다.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및 토목 기술을 비롯하여 무기 개량 상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밖에도 7세기 초엽 추고 천황 17년에는 승담징, 동 33년엔 승혜관이 각각 건너가 불교문화를 이룩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했다.
어쨌든 무장야라는 넓은 황야에다 새 문명의 기원을 세워 오늘의 찬연한 관동 문화를 창조한 것은 고구려·백제·신라인들의 위업이 아닐 수 없다. 서기 7세기말엽, 「서기천무천황 14년2월 조」에 「…백제인·고려인 백사십칠인사작위」라 명기돼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들의 공적이 얼마나 컸었다는 것을 넉넉히 알 수 있다.
현재 고려 신사에는 고마야광 원전언명무내숙니의 3위가 모셔 있으며 이 같은 고려성씨는 일본 역사상 저명 인사가 많았다. 고려 복신은 성무 천황 (724년) 이후의 육조에 봉사하여 종삼 위에 오르고 여러 고 관직을 역임한 것을 비롯하여 무장 기타 나라에서의 벼슬을 한 자 적지 않았다. 또한 근세의 소화 시대에 법무 대신 진씨도 고려촌 출신이라 한다.
이와 같이 저명 인사가 많이 나온 것은 고려왕 야광이래 세세 대대를 이어서 이제는 1천2백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 일본기 고려씨계도) .
백제·고려와는 달리 신라인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웠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류가 있었다.
서기 759년에 「무사시노구니」 (무장국) 입간군에 「신라군」을 조직했으나 백제와 고구려와는 달리 1세기 후에 군명이 고쳐지고 말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의 활동마저 멈추었다는 것은 아니다. 신라 김상욱이라는 광업가가 동경근교에서 동광을 발견하여 「지찌부」 (질부)의 연산인 금산과 암산에는 채광 유적이 그대로 보존돼 있고 그 마을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밖에도 692년에는 고승 명청·관지 등을 하내국에, 759년에는 승니 3명을 무장국에 파견하여 각기 크게 기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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