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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사관의 획일적 적용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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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북적의 평양회담은 단기 27년의 민족분단이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게 하고 있다. 「인도주의적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재결합」이라는 다분히 인정에 뿌리박은 전제는 민족·국가 재통일의 현실화에 대한 적잖은 기대를 낳기도 한다. 따라서 이번 평양회담은 과연 학술·종교·교육·예술분야 등 문화적 측면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나아가 이것의 상호교류는 어떤 문제를 안게될 것인가? 각계 인사들에게 알아본다.
학술
한적대표들이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 양측은 서로의 정치체제나 이념에 대해 논급하는 것을 피했다.
탈「이데을로기」시대라고는 하지만 극한적인 대립을 지속해온 원인이 된 것이 바로 이것들인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면에서 최재희박사(서울대 문리대·철학)는 『먼저 북한공산주의가 한민족의 특수한 사회적·말사적 발전단계의 현실성을 도외시한 채 저물변증법이란 책의 공식을 적용하려는 종래의 태도에서 기본적인 사상적 반생이 있어야겠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모든 학문적 태도가 너무나 획일적인 공산주의이론에의 적용방식으로 해석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홍이섭 박사(연세대·사학)는 가령 북한이 공산주의의 역사철학을 절대적인 자리에 두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곤란성이있다고 했다.
그점 거하순박사(서강대·서양사)는 역사에 있어서의 유물사관일변도와 자유로운 역사해석의 다양성으로 남북을 비교했다.
『모든 역사적 사실이 유물사관에 절대적으로 맞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고집하는 경우에는 어떤 토론도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기다 김일성 한 사람을 영웅화하고 그 개인을 숭배하도록 강조하는 역사주장이라면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는 것이다.
거교수는 이어 북한에 펀견투성이의 사관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분야에 있어서의 교류가능성이 당분간 어려우리라 내다봤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비록 편견화된 주장이라 하더라도 「이론」이 강하기 때문에 이「이어」을 극복, 이에 대신할 수 있는 사관을 제시 못할 때 자칫 그들의 이론에 압도될 우려도 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학술교류는 상당히 신중한 단계적 절차가 요구된다.
이념이나 방향에 따라 해석이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보다는 자연과학의 교류가 선행되어야겠다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의 역사학만 하더라도 선사학·고고학·미술사 등 분야에 있어서는 단순한 객관적 자료를 교환해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방법적으로 그것은 ①자료교환②학술지교환③국제회합 등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어학분야 특히 한글연구에 관한 분야에서 양측의 접근연구는 기대된다. 북한은 54년과 66년 두 차례에 걸쳐 한글맞춤법에 관한 수정을 거쳤던데 비해 한국은 약 40년전의「한글맞춤법통일안」을 견지하고 있다.
지난 3년에 걸친 문교부국어번의회의 작업결과 까다로운 맞춤법은 연말까지 수정안을 내기로 돼있다.
이것이 북한의 맞춤법과 우연하게도 상당히 접근한 양상을 떠고 있다고 김민수교수(고려대·국어학)는 설명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평양말」을 기준으로 해서 민족어를 가다듬는다」는 주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것의 가치평가에 앞서 인냉적인 남북의 간격조강으로 보여 안타깝다고 김교수는 지적했다.
종교
소위 북한감법제4조는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명문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이데올로기」자체에 대한 종교적 신앙체계를 제외하면 모든 종교행위가 억압되고 있다.1959년 노동당이 발쟁한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해야 하는가」라는 책자는 이점을 분명히 하고있다. 『북반부에 아직 남아서 춘동하고 있는 일부 악질 종교인들이 종교의 간판 밑에 반혁명적인 행위를 조작하여 종교적 사상을 우리사회에 부식시키려는 기도에 철저히 투쟁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따라 북한은 46년이래 사찰 및 교회와 그 재산을 몰수했으며 모든 종교집회를 계속 탄압했다. 단지 불교사찰은 고답으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물론 명목상 북한에는 「기독교연맹 중앙위원회」 「뷸교도연맹 중앙위원회」「천도구육우당」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다운 종교단체의 존재로 해석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김남수신부(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사무국장)는 북한이 공산진영가운데서도 가장 폐쇄된 사회인 점에 주의를 환기했다.
소련·중공은 물론 「폴란드」와 월맹까지도 「가톨릭」주교와 곤부가 있는데 비해 북한엔 한 사람의 신부가 없다는 점이 모든 것을 실명한다고 말했다.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자유화과정의 시작이기 때문에 김신부는 종교인의 교류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북한에 종교인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첫 단계는 가족을 찾아보는 방식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봤다.
김관석목사 (한국기독교오회협의회총무)는 강간욱의 말을 자세히 읽어볼 때 누구라도 그들의 기독교신앙은 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교회가 없는 기독교,증교인이 없거나 또는 있더라도 탄압에 의해 종교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것.
안흥덕스님(한국불교대고종총무원장)은 북한에 산재해있는 사찰들과 암자등에 승려는 없으나 역사적 고적으로만 보존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스님없는 절이 당창들에 의해 관리되는 것은 불교의 현실적 부재를 설명한다고 봤다.
그러나 불교종리들은 각기 북한산신스님들을 주축으로 북한연합교구 설치 등을 내면적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육
홍웅선교수(연대·교육학)는 북한이 그렇게도 이질적인 교육을 하고 있었나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능률적인 교육을 해오던 선진국들이 오늘날 교육의 인간화를 외치고 있다.
지식이나 기능의 전달보다 더 중요한 교육의 기능은 한 인간으로서 각자가 마음과 마음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나누면서 다양한 태도와 가치를 형성하고 창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홍교수는 강조했다.
기계적인 문명에 인간을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느낌이 허용되는 교육으로서 개인의 발전을 통해 사회가 발견되어야 교육의 올바른 기능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큭픗탁근의 사회학자 「에밀·윌캐원」의 말대로 「교육은 곧 개획적 사회화」의 수단이 되고있는 것 같다』는 이규환교수(이대·교육학)는 정치이념이나 사회문화환경의 배경적 요소위에 보지 않는 한 학생들의 태도나 교육받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생소하다고 말한다.
지도층이 이상으로 하는 인간상을, 그것도 구체적 생존인물을 조기부터 계획적으로 강조하고있는데 1∼5세 교육이 전체생애를 거의 규정한다는 면에서 볼 때 생소하지 않게 민족적 교류를 하는 일이 곤란을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점을 그는 덧붙였다.
예술
평양에서 우리대표단·수행원 및 기자단이 극히 부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일련의 문화활동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본회담의 진전상황과 함께 커다란 관심거리로 「클로스 업」되었다.
그러나 우리대표단이 관람한 「포페라」『피바다』라든가 영화 『꽃파는 처녀』등을 순수한 의미에서의 예술로 간주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문화계가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있다.
평양출신의 작곡가 김속진씨는 『직접 보고 듣지 못해 뭐라고 말할 수 없으나 사진으로 본 무대형식은 해방 전 이북에서 본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고 말하고 비단 음악 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흠국설술은 정치성을 배재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남북간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문제점이 많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술에 있어서 정치성이 두드러질 때 그 설술은 예술이 가진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가령 북한의 곳곳에 나붙어 있는 금일성의 초상화라든가, 만경호에 진열된 각종 그림, 조각들을 예로 든다면 미술의 한 방법으로서 초상화나 기수통 등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미술로서 간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역시 평양출신 영가 윤중식씨는 해방을 전후한 북한의 미술이 소련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많은 영향을 받아 인물화가 중심을 이루기는 했지만 정치·사회적인 여건으로 해서 그때보다 더 많이 퇴색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북한의 화가들이 문화초으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아 정치도구로 사용되는 그림을 그려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펜·콜롼」한국본부안에 「북한문화연구소」를 설치, 같은 민족이면서도 이질적인 문화권을 형성해온 북한문화를 연구키로 한 동위원장 백철박사(중앙대교수·문학평론가)는 남북문화교류에 있어서 수많은 난제가 수반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의 문화인들이 정치적 선입견을 버리고 단순히 예술적인 차원에서 대화를 나누는 길뿐이라고 강조했다.
북한문학인들의 정치적 문학활동은 어느 예술분야보다도 두드러지지만 막상 그들이 정치성을 떠나 단순한 예술인으로 되돌아 왔을 때 대화의 장벽이란 있을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백박사는 비단 문학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분야에서도 문화예술교류의 첫 걸음은 이러한 정치적 선입감을 떠난 예술 그 자체의 형식과 「데크니크」가 우선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학술·종구·문화예술분야의 교류나 결합가능성은 지금까지 남북회담이 촉진돼온 것처럼 어디까지나 정치적 차원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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