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71)|윤치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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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와 오래 생활을 같이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박사의 표정이나 언행이 단조하고 무미 건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오랜 해외의 광복운동을 통해서 지사적인 풍모를 갖게 된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그에겐 강렬한 감성이 있었고 섬세한 면도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는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가 한시를 많이 남겼고 서예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던 것도 잘 알려진 얘기다. 그는「워싱턴」시절에도 「바흐」의 종교음악이나 「베토벤」을 듣기 위해서 음악감상실에도 갔고 모국의 아악이나 창을 그리워했다. 그는 대인관계에서도 부드럽고 다감했다.
그가 송진우의 피살소식을 듣고 통곡하던 일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장덕수나 김구 씨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도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온종일 말없이 흐느꼈다.
이 박사는 여성에 대해서도 화사한 「타입」을 좋아하지 않았다. 청초한 미를 좋아했다. 미주시절 미국인 친구들의 결혼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듣지 않던 그가 「프란체스카」여사를 선택한 것은 이런 여성관에서다. 「프란체스카」여사는 분명하고 깊이 생각하는 「타입」의 여성이었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이 박사의 성격과 생활을 아주 철저하게 이해했다. 흔히 국민들 사이에선 「프란체스카」여사가 국정에 관여하고 인사청탁을 하며 이 박사가 사람들과 만났을 때 옆에서 얘기듣기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매스컴」의「다큐멘터리」에선 이렇게들 꾸며낸 것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박사와 손님과의 얘기가 국사인 한 참견하는 일이 없었고 우연히 한자리에 있다가도 얘기가 그런 내용이면 자리를 피하곤 했다.
다만 건강에 대해서만 철저한 시중을 들었고 국사도 그의 건강을 해치는 선에 이르지 않기를 바랐다.
이 박사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가난이었다. 그의 정치이념의 제1조는 가난의 해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국민이 굶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전란 중엔 미국의 식량원조에 적극적인 교섭을 하도록 했다. 그는 이런 생각 때문에 물가에 관심이 많았고 경제의 안정을 추구했다.
그는 가난한 민중의 편에서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가 자유당을 만들 때「상농당」은 어떠냐고 의견을 내놓았었다. 모두들 그 당명은 곤란하다고 했더니 그럼 근로당이 좋겠다고 했다.
이 당명 역시 공산사회에 있다는 것 때문에 결국 자유당으로 낙착됐지만-.
이 박사의 외교처리에만은 신통력이 있다고들 했다. 이 박사는 광복운동시절 외교에 힘을 기울였다. 건국 후에도 외교엔 깊은 관심을 갖고 일 처리를 했다.
근세 정치사에 있어 외교는 정치의 9할을 차지하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그가 평화선을 선포했을 때나 반공포로를 석방했을 때 국제법을 무시했다는 얘기들을 했지만 이 박사가 국제법통인 것은 세계적인 석학들도 인정한다. 그는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도 그 핵심을 쉽게 끌어냈다. 남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고 놀랍도록 간단히 답변한다. 대응책을 찾아내는 데도 빠르고 정확했다.
그는 곤경한 입장에서도 주체성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어떤 사람들도 첫눈에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누구든 그에게는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가 눈부신 외교포석을 펴 보인 것은 휴전 전후다.
그가 반공포로를 석방했을 때 휴전을 추진하던 우방은 모두 놀랐다. 미국은 긴급 각료회의를 열었고 연합국 수뇌는 긴급대책회의를 하는 등 난처해했고 몹시 당황했다. 소련과 중공은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기 위해 미국과 짜고 한 노릇이라고 몰아댔다.
국내의 지식인이나 일부 정치인들도 이 박사가 노망했다고 비난했다. 참전우방의 호의를 배반한 것이고 세계여론에 도전한 무모한 행동이라고 했다.
누구도 그의 깊은 의도를 알지 못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당초 군의 책임자에게 하명했다가 정보만 넘겨준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 박사는 단념하지 않았으며 원용덕과 나를 불러 의논한 뒤 끝내 단행했다. 그 자리에서도 상세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일체 설명이 없었다.
그는 포로석방에 앞서 휴전반대성명과 단독북진론을 내놓고 미국에 가서 교육받고 있는 군 장교들에게 복귀령을 내렸다. 그는 단독 북진을 위해 한국군을 「유엔」군에서 떼내어 가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이젠하워」미국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대한 군원과 한미공동방위조약체결을 제의했다.
이 박사의 힘에 의한 포로석방 단행은 그의 단독 북진론도 공포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을 미국인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포로석방 직후 「아이크」는 「로버트슨」국무차관보를 특사로 보냈다.
「로버트슨」대사는 예정을 늦춰가며 10일간 이 박사의 시달림을 받은 끝에 결국 방위조약 등 한국측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야 했다.
「로버트슨」대사는 모든 양보의 대가로 휴전회담에 한국대표도 보내라는 그들의 요구를 끈기있게 밀었으나 실패했다. <계속>
(윤치영 씨의 글은 오늘로 끝맺습니다. 다음은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지낸 한갑수 씨가 집필을 맡습니다. 한 씨는 이 박사와 만송과의 얘기도 엮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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