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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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프린스턴」대학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공동 생활에서는 인물의 진가를 알기 어려운 것 같다. 자질구레한 인정과 못난 비평의식이 따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박사를 진실로 알고 존경하게된 것은 이 박사와의 3년간의 「하와이」생활보다는 그와 헤어져서 미주본토에 갔을 때부터다.
독립운동의 길이 요원해지자 이 박사는 나를 「하와이」에 붙들어 둘 수 없었다.
나는 25년 늦가을 「프린스턴」대학으로 갔다. 이 박사는 2통의 소개장을 써주었다.
하나는 「엇·맨」박사 앞이고 다른 하나는 「딘·웨이스트」박사 앞으로 돼있었다. 「엇·맨」은 「프린스턴」대의 교수며 당대 복음해석의 제1권위인데다가 재벌이었고 북장노교의 총 회장이었다. 당시 북장노교의 총 회장이라면 미주북부의 유력한 실력자였다. 또 한사람 「딘·웨이스트」박사는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로 「라틴」화의 대가였고 「프린스턴」대의 대학원장이었다.
특히 「웨이스트」박사는 「윌슨」이 「웨이스트」때문에 「프린스턴」총장을 물러나 정계로 진출, 대통령이 됐다해서 「웨이스트」가 「윌슨」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화제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 이박사의 소개장에 대해 별달리 기대를 갖고있지 않았지만 두 분을 차례로 찾아갔다.
「웨이스트」원장에게 갔더니 이 박사의 근황을 묻곤 나의 손을 잡아보더니 『안되겠는데…』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손으론 고학을 할 수 없겠으니 학비는 면제해 주겠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치기심에서 『학비는 걱정이 없다』고 말했으나 이는 미소만 젓고 있었다. 「엇·맨」의 경우도 마찬가지 환대였다. 나는 미국인들의 단순성, 이 박사에 대한 신뢰에 놀랐다.
나는 「프린스턴」대에서 국대법과 외교학을 3년간 공부했다.
대학의 교수 등 많은 분들이 이 박사를 알고 있었다. 「프린스턴」뿐 아니라 「하버드」·「조지·워싱턴」대학 등 학계와 언론계·종교계·의회에까지 이박사의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알고 나는 놀랐다. 나는 이박사가 미국사회에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봤다. 이 박사는 대학시절 교내 모임은 물론 사회·정치·문화 활동에 초대연사로 활발히 참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해박한 동서의 지식, 능란한 화술, 절도 있는 대인태도로 인기를 얻은 것 갈았다. 그러나 이런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국애에 대한 그의 강한 의지가 그들에게 존경과 신뢰의 표적이 됐던 것 같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이 박사는 한국의 상징이었다.
그 무렵 미국무성의 중요한자리는 「프린스턴」출신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이 박사의 외교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국무성 극동문제담당고문이던 「하버드」대학의 「혼백」교수도 이 박사와는 사제관계였다.
1919년 미국상원에서 대한독립문제를 두 차례나 논의한 것은 의회기록에 남아있다. 이때 한국문제를 제기한 것도 상원의 「셀덴·스펜저」의원 등 이 박사의 친구들이었다.
나는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면서 틈틈이 이 박사의 이름을 빌어 석학들을 만났다. 그 중에도 「조지·워싱턴」대학의 「마분」총장과 「컬럼비아」대학의 「하이드·리셉」박사를 만난 일은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한국사정에 밝았고 독립문제에 대해 걱정을 해주었다. 나는 이 박사와 가장 가까운 고향사람이라는 이유로 자주 초대를 받았다.
「프린스턴」대의 유명인으로 「밀러」가의 세 자매가 있었다. 재산이나 가문도 유명했지만 그들이 순결과 효심에 있어 「프린스턴」대학의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이 세 자매는 결혼하면 「밀러」란 성을 바꾸는 것이 어버이를 상심케 한다해서 미혼으로 늙어 가는 노처녀들이었다.
이 도도한「밀러」가의 세 자매도 이 박사의 고향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그의「파티」에 초대해 주었다. 그들이 한국을 알고 있고 한국의 독립이 쟁취돼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데 있어 내가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이 모두가 이 박사가 미국에 닦아 놓은 기반이고 힘이었다.
이 박사가 한낱 망명객으로서 태평양회의, 「워싱턴」서 열렸던 만국대표회의, 세계신문대표회의, 만국교육자대회 등에 대한대표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고 활동했던 일이 결코 일시적 노력이나 우연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연합국이 종전대책을 협의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논의해 대한민국이 건립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박사가 펼쳐 놓은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다. 미국에 심어둔 한국의 「이미지」야 말로 구국의 힘이 아니었을까. 「맥아더」원수·「밴플리트」장군·「니미츠」장군 등이 이 박사를 신뢰하고 존경했던 것도 미국내의 이 박사에 대한 명성이 그 원인의 하나였으리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계속> 【윤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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