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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국사 교과를 통해본 무정견한 일본 외래어 사용|김구민 <강원대 교수·국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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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는 문화 생활을 너무 가벼이 보고 주체 없이 처리하다가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우리의 언어 생활상 시정해야 할 점이 많지만 민족 주체 의식과 가장 관계 깊은 외래어 사용, 그 중에서도 더 할 수 없이 모순을 범하고 있는 일본 외래어 사용을 서둘러 시정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우리가 일어에서 온 외래어를 얼마나 무정견하게 쓰고 있는가를 현행 고교 국사 교재를 통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같은 시대의 인명·지명인데 어떤 것은 원명을 빌어 「토요토미히데요시」 (풍신수길), 「위안스카이」 (원세개), 「랴오뚱」, (요동)식으로 쓰고 어떤 것은 주원장, 모문룡, 장춘식으로 쓴 예가 많다.
②중·일 양국에 관한 것으로서 중국은 「마관 조약」으로, 일본은 「시모노세끼 (하관) 조약」으로 이렇게 각기 달리 표기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일본 것을 취해서 「시모노세끼 조약」으로 쓰고 있는 모순이 보인다.
③같은 성질의 것인데 「도꾸가와바꾸후」(덕천 막부) 같은 것은 「막부」까지 원음으로 표기하고 「메이지」 유신 (명치유신) 같은 것은 「명치」만을 외래어로 표기하는 등 통일을 기하지 못하였다.
④고유 명사와 보통 명사가 합해서 된 「아스까」 문화 (비조 문화), 「시마네」현 (도근현), 「호류」사 (법륭사) 같은 것은 한 낱말 안에서 동일 성질의 한자가 때로 그 음이 둔갑해 보이는 혼란이 나타나 있다.
⑤역사성을 띤 인명·사건명으로서 이미 굳어져 개념화한 대마 도주, 이등박문, 소서행장, 재등 총독 따위를 일부러 일음을 빌어서 「쓰시마」 도주, 「이또히로부미」, 「고니시 유끼나가」, 「사이또」 총독 등으로 고쳐 써서 어의상 혼란을 가져오고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하는 이런 못난 자세도 보이고 있다.
⑥한자로 된 일본 고유 명사를 우리 한자음을 무시하고 일본식 한자음으로 적어 낼 때 음절수가 배가해서, 「굴본예조」→호리모도레이조, 재등보→사이또미꼬도와 같은 길고 번잡한 표기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⑦한자로 된 외국의 고유 명사를 원음으로 적는다면 동일 한글자의 표기가 한국·중국·일본이 각기 달라서 세가지 음으로 표기되는 혼란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여순」 같은 경우 중국을 따르려면 「뤼순」이어야 할 것이고, 일본을 따르려면 「료즁」으로 써야 할 테니 아무리 한자 폐지를 들고 나와도, 중국·일본이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한 이 모순과 혼란이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아무런 주장과 기준도 없이 처리된 잡동사니 외래어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혼란한 표기가 국어 생활을 얼마나 어지럽게 만들었고, 특히 민족 주체 의식을 얼마나 마비시키고 있는가 반성해야 할 줄 안다.
그런 점에서 지리적·문화적인 조건으로 해서 우리와 이웃해 있는 일본이나 중국의 언어생활 자세를 주의해 봄직하다. 일인들이 중국이나 한국의 고유 명사를 한자 그대로 표기하거나, 일본 음으로 발음하면서 일어의 음성 생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일어의 긍지를 살려나가는 그들의 일관된 자세를 우리의 관계 학자나 문교 당국은 배울 만한 일이다.
국어를 쓰다가 일어 상용을 안 한다고 해서 뺨을 맞거나 벌을 서던 것이 불과 30년도 못되는 일이다. 그 당시에도 「매야」, 「동경」, 「구주」로 쉽게 두루 통해 쓰던 것을 가지고 이제 새삼스럽게 일본말을 하듯이 굳이 일본 음을 따라서 「우메노」, 「도오꼬오」·「큐우슈」식으로 쓸 이유가 무엇일까. 더구나 국어의 생리를 그르치고, 언어 생활에 혼란을 가져오고, 주체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이러한 외래어의 구사는 하루빨리 시정돼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매야」,「대판」,「이등박문」식인 한글화 표기나, 「동경」,「천단」, 「남차낭」식인 한자 그대로의 표기나 어느 것을 취해도 무방하지만 그 발음에 있어서는 우리가 쓰는 한자음으로 통일해서 쓰는 것이 마땅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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