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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60년전 안팎-작고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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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30년대는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개화기라 일컫는다. 서구미술이 도입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과 프랑스에서 새로운 미술을 수입하고 돌아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이다. 사실적인 그림만이 아니고 후기인상파에서 야수파·「슈르·리얼리즘」「다다이즘」까지 소개돼 말기 발랄한 화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한국인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약된 일제하였으므로 인재들의 미술지망도가 퍽 높았던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미술사는 고작 60년대 불과하다. 개화의 물결은 19세기말부터 계산되지만 서구의 미술풍조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직접 받아들인 것은 1910이후. 경술 합방으로 말미암아 방황하던 젊은이 가운데 미술에 눈뜬 사람들이 고의동 김관호 김독영씨들로 그들이 생존한다면 80여세밖에 안된다. 춘곡 고의동씨가 동경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것이 1915. 당시 신문에는 「서양화가의 효시」라 해서 떠들썩했다. 김관호씨는 이듬해 졸업했고 한해 뒤인 17년에 추방 김독영씨가 졸업하고 귀국했다. 물론 그들이 유서를 발표한 것은 그 후 잠깐 동안뿐이다.
이 땅의 신미술운동에 결정적인 자극을 준 것은 3·1운동 이후인 1921년의 서화협전과 이제의 문화정책에 의해 22년에 처음 마련된 선전이다. 그후 30년까지의 사이에 이종우·나혜석·백운성씨 등이 유럽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며 일본 유학생은 한층 대다수에 이른다. 그래서 30년대에는 이 땅의 미술이 만개하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이번 미술 60년전에는 그 무렵 쟁쟁하던 작가들의 작품이 그리 출품되지 못했다. 60년전을 마련한 당초의 의도는 기억마저 흐려진 예 작품들을 모아 보자는데 더 뜻이 있었지만 막상 그것을 주선할 사람도 성의도 없었던 것이다.
춘곡의 초기 유화작품은 사진만이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김관호씨의 작품은 동경의 모교에 1점이 있고 유방의 작품은 국내에 한점쯤 있으리라 전한다.
이번 출품된 유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주경씨의 1923년작 『파란』. 주씨는 미술계를 떠났지만 아직도 자신의 작품들을 간수하고 있다가 이번에 내 놓았다. 그 다음이 이종우 노화백이 파리에 있을 당시 「살론·도론」에 출품했던 『인형 있는 정물』등 몇 점과 유적에 의해 고이 간수돼 오는 구본웅씨의 작품 몇 점이 귀하게 전시됐다.
서양화가로서 유일한 선전 심사위원이던 김종태씨의 작품과 이인성씨의 작품들이 여러 점이나 나온 것은 뜻밖의 소득이다. 그밖에도 김중현 황작술 및 나혜석 여사의 유작이 각각 1점씩 나왔는데, 찾는다면 더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초기 서양단에서 명성을 떨치던 작가로서 강신호·이창현·장석표·안석주 제씨의 작품은 더러 있을 듯 싶은데 한점도 모으지 못했다. 또 길진섭·최창순·김경·박상진·김용준·백남순·백운성·이제창·강진구·김석영 제씨도 빠질 수 없는 작가들이요, 최초의 조각가인 김복진씨는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초기 화단에서 많은 일을 한 생전의 이승만씨가 이번 60년전에 누락된 것은 커다란 「미스테이크」.
동양화와 서예는 오래된 것도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편인데 초기 신미술운동의 중심을 이루는 유화와 조각은 아주 희귀하다. 이번 60년전에는 작고작가에 대하여 여간 배려하지 않았음에도 실제 애써서 찾아내 정리 할 작품들에 대해선 그만 소홀해 저버리고 말았다. (계속)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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