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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국립박물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설계와 부지선정 숱한 말썽>
경복궁 안에 신축된 국립박물관의 새 청사가 8월 하순 역사적인 개관을 한다. 12억원을 들여 만6년만에 준공되는 이 건물은 설계와 부지선정부터 말썽이 일기 시작해 그 동안 여러 차례 내부변경을 거듭했지만 어쨌든 서울의 새 명물로 등장하게 됐다.
우선 그 외모가 요즘의 고층빌딩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수목과 잔디로 덮인 고궁을 뜰로 삼았고 북악을 병풍으로 둘러쳤다. 화강석으로 높다랗게 기단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3채의 우람한 국보건물을 화사하게 단정해 올려 세웠다.
앞으로 헌칠하게 솟은 5층탑은 보은 법왕사의 팔상전(국보55호). 뒤로 바른쪽에 김제 금산사의 3층 미륵전(국보62호)과 왼쪽에 구례화엄사의 2층 각황전(국보67)을 배치했다. 기단부를 오르는 돌층계 역시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국보23호)에서 따왔다. 기단 위의 난간은 바로 경복궁 근정전의 그것이다.
그러니까 신라시대의 기단위에 이조중기의 대표적 목조건물들을 본보기로 앉히고 난간은 아주 최근세의 양식을 따랐으니 이야말로 유사이래 1천5백년의 건조물양식을 한 건물 속에 담고 있다고 할까.
그러나 실제 박물관의 구실을 하는 부분은 옛것 그대로 본뜬 3동의 건물이 아니라 화강석으로 둘러싸인 기단부이다. 3동의 건물은 다만 겉치레로 붙여 놓은 장식물일 따름이지 사무실이나 창고로도 쓰이질 않는다. 쓰임새 없는 빈 공간이다.

<한식 콘크리트조에 회의>
말하자면 겉치레 이외엔 기능상 전혀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도리어 기단부에 속하는 박물관 내부를 여러모로 방해해 약점 투성이. 바로 이점이 끝끝내 말썽의 소지가 된 것이다.
66년 봄 문화재 관리국이 강봉신씨 설계의 「콘크리트」조 한식건물로 결정하자 극구 반대하는 층이 많았다.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살릴 수 없고 또 현대건축으로서 무의미한 시대역행이요, 특히 한옥의 「콘크리트」구축엔 공사비가 5∼10배나 더 들어 무모한 낭비라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그해 11월 4억여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기공식이 강행됐다. 연건평 3천4백평으로 69년까지 완공키로 했었다.
그동안 시공자는 8개 업자나 바뀌었다. 또 설계를 세 번이나 뜯어고쳤다. 위에 장식건물을 세우다보니 실제 박물관 내부에는 기둥 투성이. 구조상 보안조처가 허술하고 유물의 과학적 보존책도 부실했다. 그래서 대폭 뜯어고치되, 정문을 새로 뚫고 연지를 없애며 3개 건물사이의 벽을 터서 하나의 건물로 지붕을 덮어 씌웠다.

<3천5백점 전시할 진열실>
지금 시원하게 꾸며놓은 중앙「홀」은 원 설계에서 연지로 삼았던 자리이다. 청운교 밑으로 뚫렸던 현관은 지금 특별진열실로 둔갑했으며 옥상을 향해 사통팔달로 나 있던 통로도 이제는 모두 막혀버렸다. 팔상전 꼭대기 전망실도 중단상태이다.
그러는 동안에 건평이 늘어나고 새로운 시설이 부가됐다. 연건평 4천2백50평에 진열실이 1천3백80평. 공사가 3년이나 지연되고 공사비가 12억원으로 증액됐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당초에는 국립박물관과는 별개로 문화재관리국이 운영하는 종합적인 박물관을 만들 구상이었는데 그만 국립박물관의 새 청사로 면모를 달리하게 됐다. 「종합박물관」이란 명칭은 간데 없어지고 박물관측이 뜻밖의 횡재를 한 셈이다.
1층의 대리석「로비」는 국내 어느 건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크고 시원한 「홀」이다.진열실에는 새 철제 진열장으로 대체되고 그 면적도 배로 늘어나 3천5백여점을 전시하게 됐다. 1층엔 모두 10개의 진열실이 배치되고 영사시설을 갖춘 강당도 곁들였다. 지하실엔 과학적 보존설비와 창고가 마련되고, 팔상전 기단부가 되는 2층과 3층엔 사무실·자료실·공작실이 된다. 이만하면 규모와 시설면에서는 세계의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박물관이 됐다고 관계자들은 자부한다. <글 이종석 기자 사진 이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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