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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제자는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여록(111)|최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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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장관 임 면>(상)
내가 이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해방직후 지금의 연세대 의대 전신인「세브란스」병원에 있을 때였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이 박사와 백범 김구, 우 사 김규식, 이시영, 해 공 신익희 선생 등 임정요인들이 내가 일하고 있던「세브란스」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았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때 이 박사와 백범, 해 공 선생은 건강이 좋았고 생 제와 김규환 박사는 별로 좋지 못했다.
이 박사를 모시고 정부 일을 맡게 된 것은 6·25사변이 난지 꼭 1년 만인 51년 6월25일 보건 부 차관으로 임명된 때부터다. 다음해인 52년 보건 부 장관이 된 후 60년까지 문교부장관 둥을 지내며 이 박사를 보좌했다.
나의 재직 중 장관만 해도 70여명이 임 면됐다. 우선 장관 임 면에 관한 이박사의 얘기를 기억나는 대로 별 견 하고자 한다.
언뜻 보기에는 이박사의 인사기용이 다소 무정견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 나름으로 깊은 구상을 했다.
이 박사의 인사방침은 3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정부가 수립된 후 초기에는 어떤 사람이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주로 해외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장관으로 기용됐다.
초대 국무위원들을 보면 대부분이 미국에서 이 박사를 도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분이거나 상해임시정부 사람들이다.
다만 농림부장관 조봉암씨와 사회부장관 전진한씨 만이 국내인사였다.
그리고 처음 전혀 면식이 없는 이윤영 씨를 총리로 지명, 국회에 임명동의를 요청한 것은 평소 존경을 받던 조만식 선생과 월남동포들을 의식해서였다.
그때 조 선생은 조선민주당을 만들었으나 북한 땅에 연금 돼 있었기 때문에 부 당수인 이우영씨를 택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재임중기에는 자주『사람이 없어 큰일』이라고 늘 말했는데 사람을 못 미더워 했다. 그래서 인물 추천함이 설치되고 함에서 장관이 탄생되기도 했다.
인물추천 함을 통해 농림장관에 임명된 윤건중씨는 그 때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장관으로 발탁된 윤씨는 56일간인가 재직했는데 경무대에 들어올 때 밀짚모자에 끼고 있는 안경은 한쪽다리가 부러져 실로 꿰매고 오기까지 했지만 이 사람에게 크게 실망해서 인물 천거함도 실패했다.
이 박사는 말기에 가서도『장관 할 만한 사람이 없어 큰일』이라고 걱정이었는데 이때는 비교적 능력본위로 장관을 임명하는 기준이 생겼다.
이 박사는 장관임명에 당파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당의 배경이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박사 자신이 성실하고 정직하다고 판단하면 누구에게 물어보는 일없이 그냥 갑작스레 불쑥 임명하기가 일쑤였다.
기준이 있다면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이지 사욕을 채울 사람이 아니라든가, 외국과 교섭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든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라든가 하는 것이었다.
52년 2월 내가 보건 부 장관에 임명될 때 이 박사는『내가 잘 아는 사람이 적어 대개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장관을 임명하는데 많은 잡음이 들려오더라』면서『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부정』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또『장관이 일을 잘하는 것도 좋지만 인격적으로 부정한 점이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장관기용 때 소속정당을 그렇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6·25전란 속에선 야당인 한민 당 소속 조병옥 박사가 내무장관으로 임명됐었고, 여당인 자유당소속으로 국회에서 문교분과위원장을 했던 이존화 씨나 농림위원장이던 박정근씨 등은 틀림없이 언젠가는 장관에 임명될 것으로 알려졌었으나 결국 장관이 되지 못했다. 자유당 중진 중에는 여론이나 기대와는 달리 장관이 안된 사람이 이밖에도 많았다.
이 박사는 어떤 사람을 두고 여당·야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저 사람을 야당을 하는 사람』즉『나를 반대한다』는 식의 표현을 썼다.
57년께로 기억되는데 그때 자유당에서는 소속의원 중 5명인가를 장관으로 임명하도록 이 박사에 추천한 일이 있는데 한사람도 임명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말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만 송 이기붕씨 조차 장관임명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나의 판단으로는 이박사가 통일이 될 때까지는 정당을 초월하여 나라 일을 해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박사는 장관을 임 면할 때 사전에 미리 통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새 장관이 임명될 때는 잘 몰랐다. 이 박사는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다가 점심식사시간이건 저녁 7,8시건 간에 마음이 정해지면 갑작스레 발표했다.
장관해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러날 장관에게는 발표와 거의 때를 맞추어 직접 불러들여 『그 동안 애 많이 썼는데 좀 쉬지』하고 갑자기 통고했다.
한번은 부산 피난시절인데 한창 쌀값 파동이 일어나 시끄러웠다. 이 박사는 하룻저녁 농림장관을 포함해서 몇 몇 장관들과 저녁을 같이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날 아침 이 박사는 그 농림장관을 아무 예고 없이 경질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국무원 사무국장을 지낸 신두영 씨는 영문도 모르고 경무대에 불려 올라갔더니『이거, 이렇게 해』하면서 이박사가 내미는「메모」쪽지를 받아들고 장관 임 면을 발표하는 일이 많았다.
장관 임 면은 근무시간보다는 오히려 일요일이건 저녁때이건 구별 없이 갑자기 발표되는 일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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