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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위해 왕위도 버렸던 「윈저」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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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파리28일 로이터동화】28일 새벽 영면한 「윈저」공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버리기 전 10개월 동안 「에드워드」8세로 영국에 군림했었다.
「조지」5세의 장자이며 근엄했던 「빅토리아」여왕의 증손자였던 「윈저」공은 이혼 2회의 경력을 가진 미국평민 전 「베시·월리스·워필드·심프슨」여사와의 결혼을 반대한 교회 및 국가의 기존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세계적 「센세이션」속에 1936년 말 퇴위한 이래 영국을 떠나 두 살 손아래인 이 미국여자와 사실상의 망명생활을 영위해왔다.
수십 년간의 그의 이 망명생활도 「런던」교외의 궁전 「윈저」성지 하에 묻힘으로써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조카인 「엘리자베드」여왕은 이달 초 「프랑스」공식 방문 길에 「파리」근교 자택으로 병상의 숙부를 문병함으로써 형식상으로나마 「윈저」공을 복권시켰었다.
그가 국제고위 사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영국왕실 칭호에 따라 「웨일즈」군주의 칭호를 가졌던 1930년대였다.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독신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는 누가 보기에도 인기 있는 통치자, 선왕들보다 훨씬 『진취적』인 통치자가 될 것으로 믿어졌었다.
1936년1월 부왕인 「조지」5세가 승하하자 왕위에 오른 그는 이미 2년 전 「심프슨」여사와 결혼할 결의를 굳히고 있었다고 그의 한 전기는 전하고있다.
그의 「로맨스」가 사회에 알려지자 영국시민 사이에는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스텐리·볼드윈」수상과 영국성공회로 대표된 영국의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볼드윈」수상은 42세의 국왕에게 이혼한 미국평민과의 결혼은 있을 수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했던 단구의 이 공작은 그의 결혼이 왕위와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서슴지 않고 말해왔다. 만년에 가서까지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나는 같은 행동을 되풀이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에 가진 한 TV「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심프슨」여사와 결혼하지 않고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영국기존질서와의 정면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윈저」공은 미국가옥에서는 「센트럴·히팅·시스팀」으로 집안을 덥힌다는 데 지금 이 집안이 춥지 않느냐고 「심프슨」여사에게 물었다. 『전하, 말씀을 듣고 실망했습니다』라고 「심프슨」여사가 답변했다.
어째서 이냐는 질문에 여사는 『영국을 찾는 미국여성들은 예외 없이 같은 질문을 받게 됩니다. 「웨일즈」군주시면 좀더 독창적인 질문이 계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빅토리아」여왕이 아직 재위중인 1894년6월23일 「런던」근교의 「리치먼드」 「화이트로지」에서 「조지」5세와 「매리」여왕의 장자로 태어나 「에드워드·앨버트·크리스천조지·앤드루·패트리크·데이비드」로 명명되었다.
부왕은 그를 「데이비드」라고 불렀다.
가정교사의 학습지도를 받은 후 그는 1907년 영국해군사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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