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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문학의 교황'이 논하다, 대문호들의 민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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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작가의 얼굴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문학동네
376쪽, 1만8000원

저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독일 유학시절. 무심코 돌린 채널에 걸린 어느 토크쇼에서였다. 어느 여성 페미니스트가 남성지배의 정치적 귀결이 나치즘이라고 성토를 하자, 맞은편에 앉은 노년의 신사가 톡 쏘아붙인다.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를 가보라. 거기서 감동 받아서 눈물 흘리는 것은 모두 여성들이다.” 이를 듣고 킥킥거리던 기억이 난다. 그 노신사가 바로 이 책을 쓴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다.

 ‘문학의 교황’이라 불리는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독일로 이주했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인 1938년 그와 그의 가족은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분류돼 다시 바르샤바의 게토로 강제 이주당한다. 그곳에서 홀로코스트로 부모와 형제를 잃지만, 그와 그의 부인은 1943년 용케 게토를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나의 삶』이라는 자서전을 거쳐 후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폴란드 인민군에 입대하여 비밀경찰로 활동했고, 종전 후인 1948년 정보요원으로 영국에 파견돼 ‘라니츠키’라는 암호명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사상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소환돼 구금당하기까지 한다. (훗날 그는 본명인 ‘라이히’에 이 암호명을 합쳐 자신의 필명으로 삼는다. 본명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라이히’는 독일어로 ‘제국’을 의미한다)

 좌절한 그는 58년 아내와 함께 서독으로 이주해 63년에 주간지 ‘차이트’(Zeit)의 문학비평 담당이 된다. 그때부터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나, 정작 그를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인물로 만들어준 것은 공영방송 ZDF의 책 프로그램 ‘문학 사중주’였다. 내가 유학시절에 봤던 것이 그 방송이었을 것이다.

 무려 14년 동안이나 장수한 이 프로그램은 문학의 대중화에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귄터 그라스와 같은 작가는 한 시간에 네 권의 책을 다루는 이 프로그램이 문예비평을 통속화했다고 비난했다. 라이히라니츠키는 이렇게 대꾸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비평을 상당히 대중화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것들은 통속화하지 않고는 대중화하지 않는다.”

 이 책의 기원은 저자가 67년 ‘차이트’로부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초상화를 받은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그림에 관한 글을 쓴 그는 마감 후 초상화를 액자에 넣어 보관하기로 했고, 그 일을 계기로 작가의 초상을 사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결국 그의 집은 온갖 작가들의 초상으로 뒤덮이게 된다.

 언젠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발상을 한 적이 있다. 서재의 벽에 죽은 시인들의 데스마스크를 걸어놓고, 소파에 앉아 죽은 시인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을 엿듣는 것이다. 데스마스크가 초상화로 바뀌었을 뿐, 라이히라니츠키가 한 일은 내가 상상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집에 걸린 얼굴들을 돌아보며, 그 얼굴의 주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초상화 속 얼굴의 주인들은 대개 독일이나 독일어권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괴테와 실러, 하이네와 횔덜린, 카프카와 브레히트, 토마스 만과 귄터 그라스 등 이다. 그 얼굴 틈에 셰익스피어나 체호프와 같은 외국의 작가, 그리고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구스타프 말러가 끼어 있어 눈길을 끈다.

 비평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적 장르다. 이 책에서 알프레트 케어나 알프레트 폴가와 같은 비평가가 다른 문인들과 나란히 다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학으로서 평문은 작품에 대한 객관적 기술(description)과 주관적 평가(evaluation)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작품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작품의 본질을 포착하여 짧은 문장 안에 담아내는 촌철살인의 필력일 것이다.

 저자는 러시아 문학사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한다. “고골이 사회고발자였다면 톨스토이는 재판관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스스로 피고인의 자리에 섰다면, 체호프는 그저 증인의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브레히트의 극작은 이렇게 요약된다. “브레히트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연극을 원했고,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을 실현할 공산주의 사회를 원했다.”

 비평의 핵심은 역시 ‘평가’에 있다. 하지만 기술과 달리 평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종종 “내 비평은 그 자(작가)가 나를 대하는 태도의 함수다”라고 농을 한다. 그래선지 비평은 종종 불화의 원인이 된다. 저자와 귄터 그라스도 그랬나 보다. “존경하는 예술가 그라스씨, 당신의 작품 중 지그프리트 렌츠의 멋진 초상화가 있던데, 그걸 내게 보내주면 적당한 기회에 당신에 대해 호의적인 글을 쓰겠다고 약속하리라.”

 문학의 대가들에 대한 가차 없는 평가가 당혹스럽기도 하나, 권위에 주눅 들지 않는 그 가혹함이 통쾌하기도 하다. 그 밖에도 책에는 독문학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들이 등장한다. 아직 사이가 좋았던 시절, 저자는 귄터 그라스의 집에 초대를 받아 그가 요리한 가시 많은 생선요리를 먹는다. 다음날 그라스는 발라낸 그 가시들을 그림으로 그려냈고, 얼마 후 장편을 하나 발표한다. 그 장편의 제목이 바로 그날 먹은 생선, 즉 『넙치』였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서울대 미학과(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생각의 지도』『진중권의 서양미술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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