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제자는 해서암행일기의 표지|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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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월14일 계속=해주】늦은 조반을 마치고 나니 벌서 해가 꽤 높이 떠올랐다. 이제 강령으로 가려면 용당포로 해서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조금만 있으면 낮물이 밀려들어오니까 곧 포구로 가라고 촌인들이 일러줬다.
그래서 부랴부랴 포구에 이르니 그 넓이가 15리여요, 이미 밀기 시작한 조수가 사공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짐 실은 말과 김서리가 도착하지를 않아 말에서 내려 바닷가에서 잠시 기다리며 쉴 수밖에 없었다.

<부자도 초근에 쑥죽>
저녁 녘에 강령 판사촌에 이르렀다. 기와로 지붕을 이은 높고 큰집이 번장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문 밖에서 쉬어가기를 청했다.
이집 주인은 선선히 응낙했다. 그는 상방을 깨끗이 쓸고 닦으며 모 새 돗자리를 까는 등 접대가 여간 후하지 않았다. 『주인께서는 생활에 궁핍 같은걸 걱정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평년에는 그럭저럭 넉넉하게 사는데 요즘엔 먹는게 어렵습니다.』하고 밥상을 들여놨는데 초근을 넣고 쑨 죽이었다. 그의 이름은 최대생이라 했다.
3월15일-맑다. 새벽에 출발하여 강령 검박곶기에서 수소문하고 점심때 강령 동쪽 북평에 이르렀다.

<친분 찾아 둘러간다>
읍내로 곧장 다 몰려가느니보다 말에 먹이를 주는 동안 계봉(가노)이를 읍내 시장에 보내어 쌀을 사오게 했다.
20여리를 더가 해주 마산방 마을에 간신히 방을 얻었는데 주인이 우리 행색을 자못 의심하는 눈치였다. 저녁밥을 마치자 주인이 다가와 물었다. 『손님께선 무슨 일로 어디를 가시는 분인데 이같은 흉년에 말 두 필에 수행원이 넷씩이나 되며 양식과 찬거리 같은건 일일이 어떻게 마련하십니? 주관(벼슬길에 나선 사람)입니까? 유생입니까? 무인입니까?』하고 찬찬히 캐어물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을 할줄 모르며 힘이 약해서 무술도 닦지 못했으니 어떻게 관리가 될 수 있겠는가고 대답하면서 『흉년을 당해 자신(자기 몸을 돌보는 일)할 길이 전혀 없어 부득이 먼길을 떠난 것이라오 집안 사람이 연서 대사로 있어 그 사람에게 걸식코자 그곳으로 가는 길인데, 살기는 충청도와 경기도의 접경지대이지요』 그러자 주인이 재차 다그쳐 물었다. 『그럼 관서지방으로 가려면 곧바로 가지 않고 왜 빙 둘러 돌아갑니구까?』 나는 얼결에 대답하기를 『길을 돌아 먼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양식을 얻기 위해 친분 있는 사람과 관리 그리고 알만한 고향사람을 찾아다니느라고 이같이 오게 되었오』

<수령 아는데 누구냐>
주인이 또 말했다. 『이 고장을 내가 잘 아는데 관리로서 친척이 있다면 어느 고을 수령이며 고향인으론 어디 누기 삽니까. 관서의 수령이라 해도 내가 알만한데요….』
나는 대답이 궁했다. 그래서 『관리로서는 금천·봉산·장연·풍천 등에 있는 분이 모두 친척이고 금천의 이 생원, 해주의 최생원, 장연의 김생원 등도 모두 친구들이며 관서의 수령이라 함은 안주에 있는 분이 족인이고 평양·용강에 있는 분은 절친한 사이입니다.』라고 주워 섬겼다.
주인은 말을 끝맺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이 아래 마을에 서울 손님 같은 분이 좋은 말을 타고 와서 쉬는데 모르기는 하지만 혹 같은 일로 오시지 않았읍니까?』하고 찔렀다. 말 할것도 없이 그 「서울손님이란」김서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주서 청어대접도>
나는 한마디로 아니라고 잡아떼고 『주인은 무엇 때문에 그리도 묻소?』하니 주인 대답이 『그 행차에 따르는 하인들이 어둠을 타고 와서 여기 하인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는 까닭에 의심스러워 묻습니다.』고했다.
그래서 나는 『상것들(상한배)은 혹 노중에 만나 서로 알게 돼도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같이 이야기 하는게 보통이지, 나로서는 아는 바 없소』하고 그 주인의 신분에 대하여 물어봤다.
그는 본래 양인으로 이 마을에 한류하며 나이는 60이 넘었고 이름이 오흥직이라했다. 그는 또 평년엔 그런대로 지낼만 하였는데 지금은 아사를 면치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3월16일-바람이 불다. 새벽에 출발, 마령산의 험한 산길을 걸어 해주, 서면은동촌에 도착해 조반을 먹었다. 이때 주인이 청어를 내는데 길을 떠난 뒤 처음 맛보는 별미였다.

<쌀사려다 조롱 받고>
양식이 다 떨어져 무명을 팔려고 하니 1필 값이 겨우 1냥8전인데 반하여 1냥으로 전미(밭벼)8되 밖에 살 수 없었다.
행자를 모조리 털어 보니 전문 돈 약간 양과 무명 한필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마을사람들에게 양식을 수소문했더니 그들은 우리의 다급한 사정을 짐작한지라 값만 높게 부를 뿐 쌀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노인 한분을 붙잡고 사정했다. 『금년에 쌀이 귀한게 사실이지만 돈 한냥에 쌀 8되라면 평년 쌀값의 배의 배가되더라는 것이 아니겠소. 이만하면 족할 것이지 무얼 더 바라는 거요.』 그랬더니 마을사람 모두 픽픽 웃어가며 모두 흩어져 버려 끝내 양식을 사지 못하고 마을을 떠났다.
노중에 산승을 만났다. 그는 마침 시장에 가는 모양으로 무명을 그에게 보여주었더니 즉석에서 2냥5전을 내놓고 바꿔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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