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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하늘의 전쟁(14)|미그 통로의 공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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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 공군이 한국전쟁에서 공산군을 격파하는데 큰 몫을 했다는 것은 재언의 여지가 없다. 미 공군은 북괴 남침 후 해군과 함께 6월27일부터 한국전에 개입, 4∼5일 안에 2백여 대의 적 「야크」기를 무력화시키고 지상 우군엄호와 후방 보급로 차단에 영일이 없었다.

<전사상 첫 「제트」기 공중전>
그들은 쉴새없이 폭격하고 기총 소사를 하고 「로키트」와 「네이팜」탄을 발사했다. 공군 지원이 없었다면 낙동강 교두보도 지킬 수 없었고 미 해병대가 장진호에서 흥남항을 거쳐 빠져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공군은 한국에서 재빨리 제공권이란 제1차 적인 목표를 달성하고는 휴전이 조인될 때까지 매일 밤낮으로 북한의 모든 도시와 철도와 교량과 광산을 덮쳤다.
그러나 미 공군 역시 중공군 개입 후부터는 심한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른바 「공산성역」에는 접근이 엄금되었고 후방에 숨어있는 중공지상군을 강타할 수도 없었으니 지휘관들 가슴속에 불타고있는 욕구, 즉 적의 주력을 그 근원지에서 섬멸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미 공군은 북한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고 또 사실상 그렇게 했다. 그러나 적의 주된 전쟁능력은 북한 아닌 만주에 있었다.
이래서 미 공군은 한국전쟁에서는 2차 대전 때처럼 결정적인 공격력이 아니라, 부수적인 전력으로 그 역할이 줄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을 패배에서 구한 것은 역시 미 공군이었다.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 한국 전쟁은 언제나 낡은 재래식 방법으로 진창 속에서 싸워졌지만 적어도 공군의 경우 특이한 새로운 현상이 하나 있었다.
즉, 그것은 세계 전 사상 처음으로 한국상공에서 「제트」기에 의한 공중전이 실연됐다는 점이다. 적「제트」기가 처음으로 전선에 나타난 것은 1950년11월1일 미 제24사단 21연대의 「탱크」대가 신의주 남방 40km의 선천에 막 돌입했을 때였다.

<첫 교전서 적기 1대 격추>
처음에는 미 F-80의 「슈팅·스타」나 F-84의 「선더」기 같은 우군 「제트」기인 줄 생각했으나 미군 지상부대에 기총 소사를 가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적기임을 확인했다.
이제 공산군이 소제 「미그」l5「제트기」를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맥아더」사령부에서는 포로는 몇 명 잡았지만 중공군의 개입을 믿지 않고 「유엔」군을 계속 한만 국경을 향해 진격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11월1일을 기해 지상과 공중에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지상에서는 중공군의 대거출현으로 「유엔」군 진격이 정돈됐고, 공중에서는 이때까지 1백% 누리던 「유엔」군의 제공권이 중대한 도전을 받게된 것이다.
피아 「제트」기에 의한 첫 공중전은 선천출현 1주일 만인 11월8일 신의주 상공에서 전개되었다. 이날 미 공군은 한만 국경으로부터의 3「마일」이내 출격금지 해제와 함께 6백대가 신의주에 쇄도, 8천5백t의 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하여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였다. 이때 B-29를 엄호하던 미「제트」기에 만주 안동으로부터 비래한 「미그」15가 도전하여 사상최초의 「제트」기 공중전이 전개됐는데 적기 1대가 격추되었다.
신의주∼안동간의 철교 폭파는 「맥아더」원수도 이제는 중공군의 한국개입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11월8일의 첫 대결이래 휴전까지 신의주와 강계 신안주를 잇는 V자형의 소위「미그」 통로에서는 「세이버」와 「미그」의 사투가 거의 매일 전개되었다. 미 공군은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제공권의 성패를 가늠하는 이「제트」기 전에서도 개가를 올렸다. 이때의 공산 공군은 만주 봉천에 북괴와 중공의 합동사령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본부는 안동에 두고, 4백 45대의 「미그」15를 안동·대동구·대고산·봉성의 4기지에 분주 시키면서 「미그」통로에 출격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작전권은 엄격히 소련 고문관이 관장하였으며, 출격조종사 중에도 소련인과 동구 위성국인으로 보이는 백인이 일부 끼었다는 것이 입수된 정보에 의해 판명되었다. 이에 대해 미 공군이 「미그」15에 대항하여 한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F-86「세이버·제트」기는 89대밖에 없었다. F-80이나 F-84도「제트」기지만 「미그」15 성능보다 훨씬 뒤떨어져 「미그」통로에는 투입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우선 수적으로 「제트」기 전에서는 미군이 5대1정도로 열세인 데다가 「미그」와 「세이버」의 성능이 각각 비슷하게 장단점을 갖고있어 처음에는 어느 쪽이 승리할지 예측을 불허했다.

<우수한 조종기술로 미그 압도>
미 공군의 「세이버·제트」기 들은 매일 「미그」 골목상공을 비행하여 구름을 뚫으면서 하늘과 땅을 감시하였다. 때때로 압록강 너머로 「미그」기 조종사들이 만주 기지에 대기하고 있는 자기들 비행기 쪽으로 한가로이 걸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또한 미군 조종사들은 고공을 날면서 「라디오」로 편대장끼리 이런 대화도 주고받았다. 『봉성 쪽에서 비행 운이 보인다. 편대를 짜고 있군.』
『안동 상공에는 36대가 집결하고 있다.』『대동구에서는 24대 밖에 오지 않는군.』『대고산에서는 50대가 달려오고 있다. 적어도 우리 한 대에 3대 꼴은 되는군.』 공산군 「미그」 기들은 지상의 감시 「레이다」의 지원을 받고 고공을 날고 있다가 미 공군기의 연료가 떨어질 무렵에 국경을 넘어 달려들었다.
그러면 「미그」 통로를 지키고 있던 「세이버」와 곧 격돌이 벌어지곤 했다. 늘 수적으로 압도되고 있으면서, 그리고 적기와는 달리 무사히 불시착 할 수 있는 우군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이버」는 11대 1비율로 「미그」를 떨어뜨렸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공중전에서의 승자는 기체의 성능·공중전용무기·조종사 기술 등 삼위일체의 총점이 우수한 편에 돌아간다. 특히 「미그」통로상의 「제트」기전의 경우는 그러했다.
성능 면에서 본다면 「미그」15는 「세이버」에 비해 더 가볍고 속력이 더 빠른데다가 상승력이 더 있었다. 그리고 공중전투 무기로는 「세이버」가 구경 50의 기관총을 장비한데 비해 「미그」는 두 개의 20mm와 한 개의 37mm 기관포를 각각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이버」에는 「레이다」 조준 사격기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것이 성능이나 장비 면에서의 다른 약점을 보완한 셈이었다. 조종사 수준은 단연 미 공군이 우수했다. 「세이버」조종사들은 대부분이 2차 대전 때에 싸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미그」 통로에 적응할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공중전에서는 조종사 개개인의 탁월한 기술이 필요했다.
공산군 조종사들은 편대장 정도가 제대로 기술을 익혔을 뿐 나머지는 거의가 새로 모집한 신병들이었다. 미 극동공군사령부 정보당국은 「미그」조종사 국적을 알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세이버」조종사들은 「제트」공중 전초기의 그들 편대장 대부분은 소련인이며 신병 「파일러트」들은 중공과 북괴 출신이라고 믿었다. 이들 신참 조종사들은 「세이버」와 부닥치면 당황해서 우왕좌왕 하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그 실례로 이들은 보조 「탱크」를 버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기관포를 마구 쏘는가하면, 어떤 자는 피격되지도 않았는데 낙하산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다. 1953년9월23일에 노금석 대위가 몰고 귀순한 「미그」15를 시험 비행한 미 공군 기술전문가 말에 의하면 「미그」기는 고속과 고도에서는 기체가 몹시 불안하여 미숙한 조종사는 안정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소련인 편대장이 귀국한 것으로 보인 휴전 전 몇 달 동안 「미그」조종사들은 「세이버」와 조우해도 편대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편대를 풀면 「세이버」에 노출, 피격된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는데, 결국 이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은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격추된 「미그」조종사들의 3분의 2이상이 낙하산으로 탈출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미군당국은 추산했다.
「세이버」조종사들은 다른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보다 모두 나이가 많았는데 「미그」통로에서의 공중전은 조종사의 경험과 판단이 육체적 연령보다 우선한다는 게 증명되었다. 1953년3월에 작성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공중전의 승자는 노련한 조종사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전쟁 중 「세이버」손실 78대>
즉 「미그」를 격추한 「세이버」 조종사들의 68%가 28세 이상이고 한대도 못 떨어뜨린 조종사들의 67%가 25세 미만이었다.
한국 전쟁 중에 「세이버」가 격추한 「미그」는 도합 8백 10대였는데 이중 3대 이상 격추한 38명의 「에이스」조종사들 손에 처치된 것이 3백5대였다. 이 동안의 「세이버」손실은 78대 밖에 안되었다.
이렇게 「미그」통로에서의 공중전은 미 공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미그」의 출현으로 한때 큰 위협을 받았던 「유엔」공군의 제공권은 미 F-86「세이버」 전투기 조종사들의 선전으로 끝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주요일지(1951년10월14, 15, 16일)
※10월14일▲신안주 상공서 공중전 적기 3대 격추 ▲휴전회담 제4차 연락장교회의개최 ▲「콜린즈」미 육군참모총장 「유고」방문 코「티토」와 회담.
※10월15일▲「단장의 능선」서 격전 계속 ▲국방부 종군기자 22명 표창 ▲「트루먼」대통령, 자유세계 방위강화 역설 ▲「비신스키」소 외상 「노르웨이」의 「나토」가입 비난.
※10월16일▲국군 기갑연대, 고성 확보 ▲「미그」 통로서 공중전, 적기 8대 파손, 아측 손해 1대 ▲공산 측 휴전회담의 중립지대 확대주장 ▲국무회의, 대통령직선과 양원제 개헌안 통과 ▲「리지웨이」사령관, 공산 측의 휴전회담 중립지대 확대안 거부 ▲「파키스탄」의 「아리·칸」수상 피살.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사 전화는(28)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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