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제26화 경무대 사계(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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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3차 방일>
미국의 휴전 추진으로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가운데 52년11월5일 미국 대통령에 공화당 후보인 「아이젠하워」원수가 당선됐다.
「아이크」는 선거 공약으로 『53년 「크리스마스」전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했다. 이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현지 정세 파악 차 12월2일 비밀리에 우리 나라에 왔다.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미국측 요청으로 체한 일정은 비밀에 붙여졌다.
우리 정부는 중앙청 앞 광장에서 환영 군중 대회를 열고 「아이크」의 연설을 듣도록 계획을 짰다. 그러나 주한 미 대사관에서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이 대통령은 『그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 연설 한번 않다니…』 하며 혀를 차던 일이 기억난다.
도착 장소조차 여의도에서 김포로 옮기는 등 극비리에 행동한 「아이크」 일행은 나흘간 한국에 머무르며 일선 고지까지 시찰했다.
그러나 「아이크」의 방문에 이 대통령은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휴전을 강력히 추진하리라고 예견했기 때문이다.
53년으로 접어들어 이 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제3차이자 마지막 방일이다.
「클라크」 장군이 이 대통령을 초청 한데는 까닭이 있다. 이미 「스캡」(연합군 최고 사령부) 주선으로 51년10월20일부터 다음해 4월21일까지 제1차 한일회담이 열렸으나 일본의 무성의로 회담이 결렬됐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배일 감정을 무마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제1차 한·일 회담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대일 강화조약에 가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의 권유로 직접 담판을 위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일본측은 겉으로는 공손하면서도 탐색전만 벌리려 했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52년4월로 예정된 강화조약 발효만을 기다리는 속셈 같았다. 쉬엄쉬엄 6개월간 계속된 회담은 선박위·법적지위위·기본관계위·청구권위·어업위를 구성했으나 일본이 재한 구일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들고 나와 결렬됐다.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에 대처하기 위해 이 대통령은 한·일 회담 교섭 대표단(수석 대표 양유찬)의 건의로 1월18일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통칭 평화선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대일 강화 조약 발효로 「맥아더·라인」이 철폐된 뒤 예상되는 일본의 난폭한 어로를 막기 위한 것이다.
일본은 이 조치에 대경실색이었고 「부초」미 대사까지 공해 자유에 배치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부초」 대사의 항의에 대해 이 대통령은 『미국 배는 해당 안되니 고기 잡으러 와도 좋아』하고 농으로 받아 넘겼다. 그후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배는 무차별 나포했다.
「클라크」장군은 이러한 한·일간의 팽팽한 대립을 풀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 대통령도 그런 「클라크」의 속셈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뻗대야겠다는 뜻에서 이 박사는 최후 순간에 이미 결정된 스케줄 방문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주일 대표부에 훈령했다. 대통령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김용식 주일 공사가 『이미 약속된 것이니 곤란하다』는 국제 전화를 해 왔다. 전화에 대고 대통령의 속셈을 얘기할 수가 없어 무척 난처해했던 기억이다.
이 박사는 1월5일 일본으로 떠나면서도 「클라크」의 속셈에 은근히 쐐기를 박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의 이번 동경 방문 약 한달 전부터 우리 내외를 초청한 「클라크」장군 부처를 사사로이 찾아보려는데 있는 것이다. 거듭 명백히 말하고 싶은 것은 금번 여행의 목적은 공포된 외에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없다.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은 역사상 침략자가 되어본 일이 없으며 더욱이 일본에 대해 국가적 부정을 행했다고 비난될 수는 없는 것이다.
몇몇 신문에 이번 네가 일본에 온 것은 한·일 회담 교섭 재개 문제를 위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전혀 당치않은 소리다.』
그러나 이 박사는 「클라크」장군의 간곡한 요청으로 장군 저택인 「마에다·하우스」에서 일본의 「요시다」(길전무)수상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는 김용식 공사, 「클라크」장군, 「머피」주일 미 대사, 「오까사끼」(강기) 일 외상이 동석했다.
「클라크」장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담 분위기는 냉랭했다. 이 박사는 숫제 길전 수상의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자기 할말만 했다.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기 전에 오고간 얘기는 대충 다음과 같다.
이 박사 『지찌부느미야(질부궁·일천황제)의 서거에 조의를 표합니다.』
길전 『감사합니다. 각하의 조의를 천황 폐하께 전하겠습니다」(몇 마디 얘기가 오간 뒤)
길전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박사 『옛날에는 호랑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임진란 때 일본의 가등청정이란 자가 다잡아 가 이제는 구경을 하려 해도 못할 지경입니다.』
호랑이가 다니는 미개한 나라라는 「요시다」 수상의 한 말을 멋지게 받아 넘겼다.
「요시다」 수상이 낭패해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인지 「요시다」는 그 이후 말수가 적어졌다. <계속> [제자는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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